작성일 : 26-01-16 10:28
|
[그 사람의 서재] 1만 권 짊어지고 파주로 간 최재천 교수 "내 서재, 숙론의 장 됐으면"
|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6011510230003592?did=NA [1] |
[그 사람의 서재]
파주에 문 연 '최재천의 자연글방'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들어가 봅니다.
"사실 지금 되게 어색해요."
지난해 8월 퇴임한 최재천(72) 이화여대 명예교수를 교정이 아닌 파주출판도시에서 만났다. 애서가로 이름난 그는 장서 1만여 권을 짊어지고 이곳에 새롭게 터를 잡았다. 40만 부 넘게 팔린 그의 저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를 펴낸 효형출판 사옥 2층에 문을 연 '최재천의 자연글방'이다.
지난 12일 찾은 자연글방은 그가 연구실로 사용하던 이대 통섭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이었다. 지난해 5월 개관한 강동숲속도서관에 기증한 1,200권을 제외한 나머지 1만 권이 모두 이곳 서가에 꽂혀 있다. 동물행동학자, 생태학자, 사회생물학자면서 통섭학자인 그답게 과학, 종교, 철학, 인문, 역사, 경제, 문학, 어린이책까지 경계를 넘나드는 다종다양한 책들이 한데 모여 있다. "부러 이곳을 방문해주신 분들이 있으면 들여다보고 대화도 나누고, 사진도 찍고 그럽니다."
아직은 적응 기간이다. 주말도 가리지 않고 매일 아침 눈 뜨면 가방 메고 학교에 가던 그는 "돌아보니 인생 대부분을 학교에서 살았더라"며 "학교가 좋아서 학교를 못 떠나고 교수까지 했던 것 같다"고 했다. 퇴임 후 오히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단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 그 말이 맞더라고요." 여기저기에서 불러대는 통에 일주일에 한두 번, 자연글방에 얼굴을 내민다.
학창 시절 시인을 꿈꿨던 그는 최근 시도 쓰고 있다. 55년 만에 재창간한 잡지 '사상계'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며 직접 쓴 시를 실었다. 지난해 계절마다 발행된 네 권의 잡지 표지를 그의 시가 장식했다. "저는 태생적으로 문과형 사람인데 이과 공부를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계를 넘나들 수밖에 없었고, 사회참여형 학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의 독서 이력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책 읽기의 즐거움을 처음 맛본 것은 "뜻밖에도 백과사전"이었다. 총천연색 백과사전을 아무 데나 펼쳐서 한 바닥 분량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책이 귀하던 시절, 그땐 그게 '쇼츠'였다. "두꺼운 소설책이었다면 시작도 안 했을지 몰라요." 독서근육이 붙으면서 초등학생 때는 세계동화전집을, 중학교 시절엔 한국단편문학전집을 "씹어 먹었다" 할 만큼 수없이 반복해 읽었다.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 엑토르 말로의 '집 없는 천사'는 지금도 기억할 정도다. 오영수의 '메아리', 김동인의 '감자'에는 공부도 제쳐두고 빠져들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노오벨상문학전집'을 탐독했다. 이때 읽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짧은 수필 '모닥불과 개미'는 훗날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미국 유학 시절, 사회생물학 첫 수업에서 교수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사회생물학은 일개미가 자기 목숨을 던지면서 알과 애벌레를 구해내는 그 희생정신이 어떻게 진화했느냐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채 '모닥불과 개미'를 떠올린 최 명예교수는 "이거다! 나는 이걸 평생 공부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수업 부교재로 읽었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그가 손꼽는 책이다. "평소 책 읽는 속도가 무지하게 느린 사람인데 이 책은 꼬박 하루 반 만에 끝냈어요.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까 새벽녘 안개가 걷히듯 세상이 환히 보이는 희열을 느꼈죠." 그는 1975년 사회생물학을 창시해 '현대의 찰스 다윈'으로 불리는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가 돼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미시간대 주니어 펠로 연구원으로 있던 시절,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었던 책들은 오늘날 그를 만든 자양분이 됐다. 프란스 드 발의 '침팬지 폴리틱스', 아마존 열대림에 사는 원시 민족을 연구한 나폴레옹 샤농의 '야노마모', 아시아 최초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티아 센의 '불평등의 재검토'까지 두루 탐독했다. 특히 세계적 영장류학자 제인 구달의 책에 매료돼 '인간의 그늘에서'를 직접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윌슨의 대표작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2005년 '통섭'으로 옮겨, 서로 다른 학문을 한데 묶어 새로운 지식을 만든다는 통섭 개념을 국내에 널리 알렸다.
정작 책을 마음껏 읽지 못하는 건 지금이다. 그는 "너무 바빠서 한 달에 두어 권, 추천사를 쓰기 위해 읽는 책이 전부"라고 토로했다. 다만 쇄도하는 추천사 요청에도 책은 까다롭게 고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고 글을 쓴다. 잘못된 번역을 바로잡아 감수로 이름을 올리는 경우도 생긴다. 그는 "'공격적 책 읽기'라고 표현하는데, 쳐들어가서 내가 원하는 부분만 딱 읽고 글에 인용한 뒤 책을 덮어버리는 방식이 제일 좋지 않더라"며 "추천사를 쓰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책을 통째로 정독하게 되니 좋다"고 했다.
그가 추천하는 독서법은 '제목 읽기'다. 틈날 때마다 서점을 찾아 분야별로 분류된 서가 앞에 서서 몇 시간이고 제목만 읽는 식이다. 그는 "시간을 들여 이렇게 읽다 보면 어느새 학문의 흐름을 짚어낼 수 있고, 새로운 트렌드가 보인다"며 "그러다 흥미로운 제목이 보이면 몇 권 사 와 읽어보라"고 했다. 그는 최근 한 대형 서점에서 구입한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동물은 생각한다'를 읽고 있다.
한참을 책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보태겠다고 운을 뗐다. 어린이·청소년을 대상으로만 독서를 권할 것이 아니라, 퇴임 이후 노년층도 책을 계속 읽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하게 퇴임을 하고 나면 아무것도 안 읽더라"며 "공부를 멈추고, 책을 놓으면서 비판적 정신이나 판단 능력을 잃는 사례를 제 주변에서도 많이 본다"고 했다. 이어 "노인들도 공부를 계속하는 문화가 만들어지면 우리 사회가 보다 균형 있게 굴러갈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자연글방을 '숙론'의 장으로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깊이 이해하고 충분히 논의해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는 숙론 문화만 정착된다면, 대한민국은 부러울 게 없는 나라가 될 겁니다."
- 한국일보 2026.01.16 권영은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