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8-28 21:14
아카이브의 나라, 한국을 꿈꾼다
김홍남 /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기록을 통해 인간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었다. “우리가 서판이나 파피루스에 쓸 수 있었던 글은 누군가가 그걸 읽는 순간 되살아난다. 잊지말게. 앎이란 곧 탄생임을”이라는 의미깊은 말을 남겼다. 허나, “앎의 탄생”이 기록 읽기에서 시작되는데, 정작 그 기록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면 다 헛 일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승려 일연이 기록하는 습관과 이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집필노력, 그리고 그의 사서가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다면 『삼국유사』는 없고, 대한민국의 고대역사는 이렇게 풍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의 기록정신과 아카이브관리체계가 있었기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그리고 찬란한 의궤 등이 그토록 잦은 전란에도 불구하고 남아, 한민족이 문헌기록에 기초한 역사적 민족으로 당당히 자부하고, 현재의 대한민국이 세계가 무시할 수 없는 국가가 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자긍심은 경제적 성공으로만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민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기억의 공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 민족에 있어 기억은 유무형의 문화유산과 역사와 전통의 축적이다. 기억이 저장되어 있지 않는 민족은 자존감을 상실한다. 기억이 축적되지 않는 나라, 기억을 지키지 못하는 민족은 안으로는 중심과 지속성을 잃고 밖으로는 다른 민족의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러한 나라는 지구가족의 기억네트워크에서 제외되어버린다. 그러한 운명을 맞은 서역이나 남미의 잃어버린 왕국들을 생각해보라.


아카이브는 많을 수록 좋다
한 민족에 있어 기억의 장치는 다양하다. 우리는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기록하고, 역사를 서술한다. 문학과 예술도 기억을 축적한다. 박물관ㆍ미술관은 사라져 없어질 동산문화유산을 수장하고 전시하여 우리의 기억을 보존하고 상기시킨다. 현대미술관, 도서관, 아카이브도 중요한 기억의 장치이기도 하면서 기억할 만한 가치를 지닌 문화를 창조해 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도록 일한다. 이들 장치들은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필요불가결한 기억저장력과 재생산력, 재창조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아카이브는 수없이 많을수록 좋다. 작게는 작업노트, 일기, 회고집, 서신모음, 전시 리플렛과 도록 등 을 포함한 개별인물의 아카이브에서. 개별단체(오케스트라, 공연단, 극장, 뮤지움 등)의 기록물아카이브, 음악, 문학, 미술(건축과 공예 포함), 영화, 공연 등의 분야별 아카이브 그리고 학문별 아카이브 등, 또 크게는 조선왕조의 위대한 전통을 이은 국가적 기록사업과 국가기록보관소의 활발한 운영 등등 이다. 필자가 국립민속박물관 관장 재직(2003-2006)시 역점사업으로 추진 한 것이 「민속아카이브」신설과 그것이 문화부체제와 박물관조직 내 뿌리내릴 수 있는 공간ㆍ예산확보와 인력기반조성이었다. 참으로 보람있었던 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 서울아트가이드 2010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