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8-28 21:17
故 이근직 교수와 慶州學(경주학) 아카이브 관리자
함순섭(국립대구박물관장)


문화 역량을 생각해 본다. 가시성을 지닌 문화 행위는 기획에서 실행까지의 과정을 대체로 가늠해 볼 수 있다. 비록 모두가 기획 단계를 직접 볼 수 없을지라도, 참여자는 눈앞에 드러나는 성과를 통해 일련의 과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화 행위가 문화 역량으로 선순환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즉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정합성을 가진 자료로의 정리 또는 기록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자료의 역사화(歷史化)일 수도 있겠는데, 이는 외국어로 ‘아카이브’라고 한다.

풍부한 아카이브는 문화역량의 밑거름이자 추동력이다. 시행착오를 줄이고 본질에 쉽게 접근하도록 도와주며, 현재의 흐름을 되짚어 역사적 맥락을 살필 수 있게 한다. 이 밖에 매우 아이러니한 부분도 있다. 은근 슬쩍 부풀리거나 작정된 거짓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키는 힘도 지녔다. 대표적으로 우리의 현대미술계에는 김달진 선생이 있다. 선생이 청소년시절부터 수집한 방대한 현대미술 자료는 과거에 어림짐작으로 서술되던 한국 현대미술사를 단번에 정리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더불어 선생의 아카이브는 ‘김달진미술연구소’라는 단체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공유되므로, 수많은 연구와 창작에도 보탬이 되고 있다.

이번 문화칼럼은 제목과 다르게 서두가 너무 거창하다. 이유는 너무나 안타까운 부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조사를 쓰기에는 한 사람이 지녔던 꿈이 묻히고, 마음 속 슬픔을 그대로 표현하자니 그의 꿈을 설명할 여지가 사라질 것 같다.

6월 17일 아침에 어느 한 역사 연구자가 세상을 떠났다. 경주대학교 대학원장이자 대학원 문화재학과장이던 고 이근직 박사이다. 출근길에, 그것도 대학의 정문 바로 앞에서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마흔 아홉의 창창한 한 생명이 떠났다. 이근직은 경주 사람이며, 신라 무덤이 옹기종기 남아있는 금척리가 고향 마을이다. 고향 사랑이 그를 역사가로, 특히 신라사 연구자로 이끌었다. 한때 문헌 연구에 집중하기도 하였으나, 근년에는 문헌과 역사 현장을 적절히 해석한 신라의 왕릉 및 도성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런 그에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흔하고도 중반을 훌쩍 넘은 나이에 문화재청 전문위원으로 처음 안정을 찾았으니, 그간 일상에서 겪었던 고난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듯하다.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 살았던 젊은 날은 그냥 선비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늦은 나이에 문화재청으로 가게 되면서도 그는 오히려 주저했다고 한다. 신라사 연구의 근간인 경주를 떠나기가 그토록 싫었던 것이다. 이 일화는 그가 평생을 적당히 타협하며 살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그는 공부만 아는 샌님이 아니었다. 고문헌과 경주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남들과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1994년 벽두에는 주변에서 공부하는 이들과 함께 본인이 작명한 ‘경주학연구원’을 시작하였다. 공부모임에 불과했음에도 ‘경주학연구원’이라 이름을 지은 것부터 독특하다. 고대에서 근대까지 경주와 관련한 모든 것을 담겠다는 의지가 읽혀지는 이름이다. 더부살이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시절을 지나, 2005년에는 드디어 공부방을 열어 스스로 방지기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온-오프라인을 통해 본격적으로 대중과 소통하였다. 강연과 답사 그리고 자료 정리, 해를 거듭할수록 성과는 늘어갔다. 연구원의 활동은 2천60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인터넷카페에 경주학 관련 자료들과 함께 꼼꼼히 잘 정리되어 있다.

그는 고향 선배이자 같은 길을 가는 동지였다. 하지만 나의 미련한 불찰로 2006년 초에야 그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공부방의 빼곡한 책들에 묻힌 그는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 주었고, 몇 마디 나누지 않았으나 그의 꿈이 어디에 있는지도 읽혀졌다. 또한 신라보다 경주라는 말을 앞세운 까닭도 알 듯하였다. 그는 경주학 아카이브를 꿈꾸고 있었다. 대중과 공유하는 경주의 역사연구 운동을 그는 만들고자 했다. 뛰어난 언변은 역사현장에서 모두를 감동시켰고, 스치는 상식이 아니라 모두가 전문적인 지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었다. 두 세대 이전부터 시작된 경주에서의 시민 역사연구 운동이 그를 통해 한차원 더 발전하였던 것이다.

아! 이제 누가 있어 경주학 아카이브를 구축해 나갈 것인가. 슬프고 애달프다.


- 대구 매일신문 201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