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05 10:11
집에서 잠자던 책, 출판시장을 뒤흔들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04/2013060403281.htm… [391]
(박돈규 기자)

[알라딘 중고책 서점, 14호 개점… 교보문고 매장 16곳 바짝 추격]
진짜 '헌책'은 없다 - 낙서 5쪽 넘으면 매입 않고 古書·수험서·전집도 없어
스마트 시대에 왜 중고책인가 - 유행 타는 '패스트 북' 늘면서 책 소장 가치 떨어졌다는 방증
출판시장 得일까 失일까 - 출판계 "책 시장 가격 파괴", 알라딘 "선순환 유통에 기여"

"손님, 이 책은 다섯 군데 넘게 낙서가 있어 매입이 안 됩니다."

새겨두고 싶은 문장에 볼펜으로 밑줄 친 것을 점원은 '낙서'라 불렀다. 지난 29일 오전 알라딘 중고서점 종로점. 집에서 가져온 책 세 권을 계산대에 올렸다. 상태가 양호한 어린이책, 밑줄 그은 대목이 여럿 있는 과학책, 나머지 하나는 '증정' 도장이 찍힌 자기계발서였다. 'Not Busy(바쁘지 않음)'라고 적힌 유니폼을 입은 점원은 5초쯤 책장을 휘리릭 넘겨 보더니 매입 여부와 값을 판정했다. 9500원짜리 어린이책은 1000원, 다른 두 권은 '매입 불가' 퇴짜를 맞았다.


알라딘 중고서점 종로점의‘고객이 방금 팔고간 책’코너 앞에서 독자들이 책을 고르고 있다. /성형주 기자
알라딘 중고서점이 지난달 중순 서울에 건대점을 오픈했다. 2011년 9월 1호점(종로점)을 연 지 19개월 만에 전국 14번째 매장이다. 교보문고 매장 수(16곳)를 곧 앞지를 기세다. 종로점(150평)은 잘 정돈된 도서관 같았다. 바닥에 쌓여 있는 책이 없고 쾌적하며 조명이 밝은 게 동대문 헌책방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중고 책을 팔러 온 사람과 사러 온 사람이 은행처럼 번호표를 뽑고 차례를 기다리는 중. 서가에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누명'을 집어든 고객 김아름(29·경기 안양)씨는 "일단 값이 싸고 대형 서점에 비해 조용하며 붐비지 않아 좋다"고 했다.

2008년 온라인에서 먼저 시작한 알라딘 중고 사업은 지난해 전년에 비해 34%, 올해는 38% 성장 중이다. 전체 유통 권수와 매출 규모는 공개하기를 꺼렸다. 종로점의 경우 하루 2000부가 들어오고 그만큼 팔린다고 한다.


스마트 시대에 왜 중고서점이 번창할까. 종로점·건대점·대학로점을 운영하는 김의창 점장은 "집에서 '잠자는 책'이 그만큼 많고, 저렴한 책을 찾는 사람도 많기 때문인 것 같다"면서 "이사철과는 별 관련이 없고 여름·겨울방학 때 고객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유행에 맞게 치고 빠지는 '패스트 북(fast book)'이 많아지고 소장 가치는 떨어지면서 나타난 현상"(한미화 출판평론가)이라는 해석도 있다.

중고(中古)라는 말은 그래서 '아름다운 모욕'처럼 들린다. 출판계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대해 "영 불편하다"는 반응이다. "대형 오프라인 서점 옆에 개점해 '알라딘 중고서점에 찾는 책이 없으면 대형 서점으로 가라'는 식의 전략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흘러나왔다. 한 출판사 사장은 "독자에게는 실속 있는 책 시장이겠지만 출판계 입장에서는 베스트셀러 중심의 가격 파괴 서점일 뿐"이라면서 "출판사가 새 책을 직거래로 할인해 판다는 소문도 있다"고 말했다.

알라딘은 그런 시선에 대해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재고량이 정해져 있어 같은 책을 대량으로 사고팔 수 없다는 것이다. 도서 검색대에서 한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1~10위를 찾아보니 대부분 없었고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3400원), '빅 픽처를 그려라'(7800원)가 한 권씩 있었다. 김의창 점장은 "베스트셀러가 가끔 들어와도 먼저 본 고객이 순식간에 사간다. 복불복"이라면서 "새 책 판매량을 잠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현재는 선순환 중"이라고 했다. 좀 전에 내다 판 어린이책은 상품등록을 마치고 서가에 진열돼 있었다.

☞중고책, 가격은 어떻게?

알라딘 중고서점은 중고 책을 최상급·상급·중급으로 분류한다. 낙서가 조금 있거나 변색된 책은 ‘상’, 표지가 구겨지거나 낙서가 좀 더 많은 경우는 ‘중’, 본문 일부가 찢어졌거나 다섯 쪽 이상 낙서가 있거나 물에 젖어 훼손된 경우는 매입 불가다. 따라서 헌책의 매력 중 하나인 세월과 전 주인의 흔적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알라딘에 등록되지 않은 책, 시즌성이 강해 재판매가 불가능한 책, 고서(古書)·수험서·참고서·전집도 취급하지 않는다.

- 조선일보 2013.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