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07 10:41
해방촌·홍대앞·서촌 … 종이잡지로 이웃과 소통한다

SNS 시대에 인기 끄는 아날로그 동네소식지들
‘해방촌 오거리에서 녹사평역까지 가는 베스트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지난달 발간된 동네잡지 ‘남산골 해방촌’ 4호는 표지기사로 ‘골목길 가이드’를 실었다. 서울 용산동2가의 해방촌은 1945년 광복 뒤 이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정착하며 이뤄진 마을이다. 근래엔 싼 집값에 찾아오는 외지인과 외국인이 많다.

뜻 맞는 주민들 모여 무가지로 발행




잡지는 학생·직장인·요가강사는 물론 용산 미군부대에서 복무하는 카투사까지 20~30대 다양한 사람 10여 명이 만든다. 1주일에 한 번 저녁에 모여 회의를 하고 밥을 먹는다. 잡지 출판에 참여하고 있는 이한솔(29·회사원)씨는 “해방촌을 좋아하고 동네친구를 만들고 싶어 온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잡지는 원래 서울대에서 도시계획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발행인 배영욱(39)씨의 과제로 시작됐다. 지난해 3월 배씨가 버스정류장에 ‘동네잡지를 만들 사람을 찾는다’는 벽보를 붙였고, 곧 사람들이 모였다. 계간으로 600부를 찍어 동네 카페 등에서 직접 배포한다. 편집장을 맡고 있는 대학생 정해지(23)씨는 “처음엔 이런 걸 왜 하느냐는 반응이 많았지만 요즘은 재미있게 봤다며 더 찍어달라는 분들이 생겼다”고 했다. ‘왜 굳이 종이잡지냐’는 질문에 그는 “10대부터 60대까지 그냥 우리 동네사람들이 쉽게 봤으면 해서…”라고 말했다. 최근 페이스북을 열기도 했지만 크게 필요성을 못 느낀단다. 발간일엔 동네 카페에서 음식을 준비해 와 ‘동네잔치’도 열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확산돼 있는 시대에 종이잡지가 인기를 끌고 있다.

 라도삼 서울연구원 연구위원은 “경제위기 이후 대안적 삶을 찾겠다는 사람들이 지역을 돌아보기 시작했다”며 “동네잡지가 도시계획이나 상업화로 불거진 지역 문제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안문화의 창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매달 중순 마포구 홍대 주변 소식을 전하는 ‘스트리트H’는 이달로 창간 4주년을 맞는다. 잡지사 출신으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장성환(49)·정지연(42)씨 부부가 2009년 6월 창간했다. 5명의 객원기자와 홍대앞 막걸리바 사장 등의 기고로 만들어진다. 발행부수는 3000부. 기본적으로 무가지지만 1년에 1만5000원의 정기구독료를 내고 자신의 주소로 배달받아 보는 독자도 200여 명에 이른다.

문화행사·상가지도 등 알찬 정보

홍대앞 사람 얘기를 주로 다룬다. 지난달에는 인디가수 등 ‘홍대앞에서 브랜드를 키워가는 청년 5인’과 15년간 홍대앞을 지켜온 음악주점 ‘꽃’의 사장 인터뷰 등이 실렸다. 홍대앞 문화예술행사를 정리한 일정표와 ‘동네서점 베스트셀러’ 등 동네잡지만의 콘텐트도 눈에 띈다. 매달 새로 생기고 없어진 상점들을 발 빠르게 반영한 홍대앞 지도를 싣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홍대앞이 번성하면서 창간호 때와 비교해 지도의 범주가 훨씬 넓어졌다. 홍대앞에서 30년 동안 살아온 발행인 장성환 대표는 “독특한 문화를 가진 홍대앞의 변화상을 기록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역 문제를 제기한 대표적 소식지는 ‘서촌라이프’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효자동·사직동 일대 경복궁 서쪽마을을 일컫는 ‘서촌’의 소식지다. 서촌라이프는 2011년 3월 창간호부터 꾸준히 “지역민들이 ‘서촌’이라고 불러온 이 지역을 구청이 ‘세종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라는 주장을 제기해 왔다. 동네 이름은 자연스럽게 불리는 것이지 구청의 강요로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요지였다. 지역의 상업화 문제도 꾸준히 짚어왔다. 발행인 설재우(32)씨는 “언론에서 하나같이 유명한 곳만 소개해 방문자들의 쏠림현상이 심하다”며 “동네의 오래되고 소외된 곳을 찾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응원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엔 외면 … 이젠 “더 찍어달라”

 이 밖에 예비사회적기업 ‘안테나’가 발행하는 ‘문래동네’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문래창작촌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2008년부터 비정기적으로 10호까지 발행해 온 ‘헬로가로수길’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 동네잡지다. 주로 그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적 자원이 있는 곳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다.

 이들 동네잡지 대부분은 정기적 발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작비 조달이 쉽지 않아서다. 남산골 해방촌의 경우 올해 용산구청으로부터 6개월간의 제작비를 지원받았다. 기간이 끝나면 다시 지원받을 곳을 찾아야 한다. 4년간 한 호도 빠짐없이 발간해 온 ‘스트리트H’는 제작비 대부분을 자비로 충당한다. 전체 16페이지 중 한 페이지만 광고를 싣는다. 최소한의 광고를 받고 있다. 발행 초기 6개월간 마포구청의 지원을 받았지만 ‘새우젓 축제를 실어달라’는 구청의 요구를 거절한 뒤 독자 발행의 길을 걸었다. 편집장 정지연씨는 “좋아서 하는 일이라 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지속적으로 발행할 수 있을지 많이 걱정한다”며 “사회적기업으로 만드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촌라이프는 동네 풍경을 담은 엽서 등 기념품을 판매해 수익을 내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김소현 기자

- 중앙일보 2013.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