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10 15:21
사재기 파문 그 후…책은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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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사재기 파문을 촉발한 소설가 황석영의 ‘여울물소리’ 절판에 이어 한국작가회의, 천주교인권위원회의 검찰 수사 촉구 등 출판계의 고질적인 사재기 병폐를 뿌리 뽑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황석영은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잘못된 출판 유통관행을 바로잡겠다”며, 관련법 개정 청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또 사재기 의혹으로 명예를 실추시킨 해당 출판사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준비 중이다. 국회와 정부도 나섰다. 사재기 근절을 위한 법적 장치 강화방안을 검토하고 있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도 출판사, 서점, 유통사로 위원회를 구성, 해법을 찾고 있다. 그러나 사재기의 법리적 해석과 출판 주체 간의 엇갈린 이해, 문화산업에 미치는 영향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사재기 법적으로 규제가 가능한가=지난 5월 31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세미나실에 출판유통심의위원회 20명의 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출판인회의가 2007년부터 민간 자율로 운영해온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를 출판인회의의 요청으로 진흥원으로 이관한 지 한 달 만에 이뤄진 첫 모임이다. 위원회 운영과 관련한 논의가 주된 목적이었던 이날 자리는 파장을 몰고 온 사재기 근절방안이 자연스럽게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지만 얘기는 원점을 맴돌았다.

무엇보다 책 사재기는 적발이 쉽지 않다는 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지능적인 수법들이 동원된다고 하지만 거의 심증일 뿐 물증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가 그동안 사재기를 적발해 문화체육관광부에 신고한 실적을 보면 한두 건에 불과하다. 사재기가 주로 일어나는 인터넷 서점의 경우,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고객의 ID나 e-메일 등의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데 한계가 있다. 구매 내역을 공개하라는 외부의 요구에 응할 수 없는 이유다. 한 사람이 책을 200, 300부 샀다고 해서 사재기로 몰아붙일 수도 없다. 모임이나 직장에서 필요에 따라 종종 다량 구매도 이뤄지기 때문에 일일이 이를 확인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다.


책 사재기로 베스트셀러 조작 의혹이 표면화되면서 이번에는 과연 출판계의 고질적인 병폐가 고쳐질지 관심사다. 작은 출판사들은 자본에 밀리지 않고 좋은 책을 내면 독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곘다는 반응이다.

사재기로 적발된 경우, 현재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을 벌금형으로 강화하는 방안도 간단치 않다. 법리적으로 볼 때 사재기가 범죄행위인가에 대해 우선 의견이 나뉜다. 사재기는 비슷한 단어랄 수 있는 물건값에 영향을 주는 매점(買占)과도 다르고 공정거래법 시행령상 불공정 행위로 예시된 ‘위계(거짓 계략)에 의한 고객 유인’도 책 사재기에 딱 들어맞진 않는다. 또 사재기와 비슷한 형태가 영화와 음반 등 문화산업 전반에서 행해지고 있는데 출판계만 법 적용을 하는 것도 맞지 않다. 만약 이를 폭넓게 적용할 경우, 문화산업의 위축을 초래할 수도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책 사재기를 인정하고 있다. 출판시장이 워낙 크다 보니 웬만한 사재기로 시장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신고포상제 도입도 부작용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지식산업을 일궈온 출판인들의 자부심과 상호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사재기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판계의 자정노력과 신사협정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렇긴 해도 사재기 근절을 위한 법 제도 강화에 출판계가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만큼 어떤 형태로든 가시화될 공산이 크다.

▶베스트셀러 집계 이대로 좋은가=책 사재기의 목적은 베스트셀러 만들기다. 따라서 베스트셀러 집계가 과연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도 제기되고 있다. 베스트셀러에 올라야만 입소문을 타고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책이 더 팔리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최근 베스트셀러 쏠림현상은 갈수록 심해지는 양상이다. 모바일 영향으로 독서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독서력 저하로 베스트셀러 중심의 책읽기로 단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서점을 중심으로 한 과도한 할인경쟁도 베스트셀러 왜곡을 낳고 있다. 최근 영화 개봉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 출판사 간 반값 할인 경쟁으로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나란히 차지했다. 베스트셀러가 할인행사를 벌이는 구간으로 온통 장식될 때도 있다. 베스트셀러 무용론이 제기되는 이유다. 그럼에도 베스트셀러가 출판의 흐름과 독자의 생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필요하다는 쪽이 더 많다.

현재 베스트셀러 집계는 한국출판인회의가 온ㆍ오프라인 서점을 대상으로 집계한 데이터를 비롯해 출판인협동조합의 집계, 온라인서점이 각각 집계한 베스트셀러 등 다양하다.

온라인서점의 경우, 하루에 500, 600부만 구매하면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구매층이 얇아 쉽게 사재기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사재기가 의심되는 경우, 이를 집계에서 빼고 집계를 일원화하는 등 업계의 중지를 모아 집계방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베스트셀러 쏠림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독서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독서력 저하로 선택폭이 단순해지고 있기 때문
이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할인경쟁도 또다른 왜곡을 낳고 있다. 사진은 한 서점의 베스트셀러 판매대.

▶‘사재기 의혹’ 이후, 자음과모음은?=지난 6월 5일 출판사 자음과모음 출판부 회의실. 사재기 의혹의 직격탄을 맞은 자음과모음의 비상대책위원들은 이날도 얼굴을 맞댔다. 박제연 마케팅팀 차장은 요즘 편집부 팀장들의 얼굴에서 절망 대신 어떤 결연함을 읽는다. 주위에서 보내는 눈길이 힘들고 부담스러울 텐데, “이럴 때일수록 더 좋은 책으로 바른 모습을 보이자”며 더 열심히 뛰는 눈치다.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몇몇 필자는 출판 계약을 취소했다. 아무래도 사재기 의혹이 불거진 출판사, 유명 작가가 책을 절판한 출판사에서 자신의 책을 내는게 꺼려지는 건 당연하다. 사건이 터지고 많은 이들이 그에게 물어온다. “사재기 전문 대행업체가 있다는데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이 있나요?” 그는 그런 데가 있다는 소리도, 제안을 받은 적도 없다고 말하지만 믿어주지 않는 눈치다.

이날 안건은 이번 사태로 강병철 사장이 물러난 데 대해 후임 대표 선정과 관련한 사안이었다. 물망에 오른 분이 몇몇 있지만 급하게 정하기보다 신중하게 정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사옥 매각건도 논의됐다. 사옥을 내놨지만 아직 사려는 곳은 없다. 지금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안은 황석영 작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이다. 출판사로선 문단의 어른인 작가의 명예를 크게 훼손시켰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