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17 10:37
[김동석의 동서남북] 세상 떠난 군산 한길문고 사장이 남긴 것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16/2013061602174.htm… [415]
(김동석 사회부 차장)

전북 군산시 나운동 한길문고의 이민우(52)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취재차 서울에서 내려갈 계획을 전한 건 지난 3월 25일 오전 8시 30분쯤이었다. 장서 10만권의 지하 1층 한길문고가 지난해 8월 군산에 내린 폭우로 완전히 물에 잠겼다가 2500여 시민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부활해 2층에 새로 문을 열었고, 사장인 그가 서점 공간 일부를 시민들에게 무료로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진보적 시민 단체 활동에 활발하게 참가해 왔던 이 사장은 기자의 요청에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그는 "무슨 이야기가 된다고 여기까지 오느냐"면서 "오전엔 병원에도 들러야 한다"고 여러 차례 고사했다. 재차 부탁하자 그는 "병원에서 오래 시간 끌지는 않을 것 같으니 오후엔 서점으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오후 2시쯤 군산 한길문고에 도착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 사장은 그날 원광대병원에서 복부 CT 촬영을 했는데 '상태가 이상해' 서점으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27일엔 그가 삼성서울병원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곧바로 찾아가 그와 처음 대면했고, 약속을 어긴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지난해 수해 이후 조금씩 살이 빠져 병원을 찾았지만 당뇨 판정을 받았을 뿐 다른 이상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64㎏이었던 몸무게가 51㎏으로 줄었는데도 소화불량만 의심했다는 것이다. 삼성서울병원에 와서야 복부 전체에 암이 퍼져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사형선고' 소식을 전하는 그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하고 담담했다. 가족에게 둘러싸인 채 병상에 반듯이 앉은 그는 수해 당시 상황과 시민들의 도움에 대해 소상하게 말했다. 인터뷰 말미엔 "좋은 일도 아니니까, 아프다는 이야기는 기사에 쓰지 마소"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두 달 반가량 지난 6월 14일 오전 5시 29분, 그의 아들로부터 "아버님이 새벽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문자가 왔다. 이 사장은 암 판정 이후에도 수차례 서점에 들러 운영을 걱정했다고 한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기 전, 우리는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 헌책의 먼지 냄새, 새 책의 잉크 냄새를 향기로워하던 세대였습니다. 그렇기에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마다 큰 어떤 것을 잃어버리는 상실감에 젖곤 했습니다."

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는 한길문고 침수 사건 때 시민들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런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디지털 시대가 오기 전 우리는 손으로 책의 감촉을 느끼고, 침 묻혀 책장 넘기면서 책을 맛보고 소리 듣고 냄새 맡는 오감(五感)의 독서를 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전자책(電子冊)으론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독서법이다.



디지털 시대에 동네 서점은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의 서점은 1994년 5600여개에서 현재 1700여개로 줄어 하루에 하나꼴로 폐업하고 있다.

하지만 아날로그는 무조건 낡고 뒤떨어진 것일까. 종이 책이 상징하는 아날로그에는 우리의 정서와 본능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 취재 당시 서점에 있던 한 손님은 "나도 한길문고 구하기 자원봉사에 동참했다가 피부병을 얻었다"면서 "종이 책은 절대로 사라지면 안 된다. 애들 좋아하는 휴대폰이 책을 대신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이 나처럼 느꼈기에 자원봉사에 나섰던 것"이라고 했다.

이민우 사장은 시민들의 호의에 보답해 서점 일부 공간을 헌책 교환 마당, 세미나장, 공연장으로 내놓았다. 한길문고는 '책을 파는 곳'을 넘어 지역 문화의 중심지로 변신 중이다. 이 사장은 세상을 떠났지만, 아날로그의 상징인 서점이 디지털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고 갔다.


- 조선일보 2013.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