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3-28 10:38
헌책의 향기와 사람의 온기가 섞인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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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응암동에 자리잡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독서모임, 심야개방 등 독특한 행사를 열며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한다. 지난 25일 오후 윤성근(왼쪽부터) 대표와 정나미, 이종훈, 이시욱씨가 막독 11기 예비모임을 하며 앞으로 함께 읽을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문화‘랑’] 문화공간, 그곳
(8)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프랑켄슈타인>, <몰락하는 자>, <롤리타>, <일리아스>, <집행인의 귀향>,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마오Ⅱ>. 4월부터 석달 동안 진행하는 ‘막막한 독서모임’(막독)에서 읽을 책들이다. ‘느님’, 즉 신 또는 신격화를 주제로 한 인문서와 서사시 또는 소설이다.

막독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하 이상북)의 독서모임으로 2011년부터 시작해 한 해 네 차례씩 진행됐다. 4월 모임은 11기다. 1기 10명으로 시작해 3년이 지난 지금은 40여명으로 늘어 4개로 분반한다. 그동안 연애, 모험, 도시, 여행, 혁명, 잉여, 애욕, 돌+I 등의 주제를 다뤘다.

“세계문학전집이 일련번호만 매겨져 있을 뿐 체계가 없어요. 독자들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죠. 그리고 작가의 대표작만 출판합니다. 깊이 읽으려는 독자들은 해당 언어를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임의 진행자인 이시욱(시로군)씨는 이런 출판계 현실과 막막한 독자를 위해 모임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2주에 한권씩 책을 읽고, 모임에서 인상깊은 대목을 표시해 와서 낭독하고 토론한다. 낭독은 작중인물과 인물이 놓여진 상황은 물론 문장의 구조와 문맥을 이해했을 때 제대로 할 수 있는 점에서 작품 자체에 빠져들게 하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다른 참가자들이 어떤 대목을 골라 어떤 식으로 낭독하는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고 한다.

은평 응암동 지하 서른평 공간
주인장의 손때 묻은 책 팔아
독서모임 ‘막독’ 낭독과 토론
한달에 두번은 밤샘 개방해
글쓰고 공연도 보며 ‘얘기꽃’


막독 독서모임이 열리는 이상북은 말 그대로 이상한 헌책방이다.

헌책방이라면 신촌, 홍대 앞, 동묘 근처에 끼리끼리 모여야 제격일 터인데, 이상책은 서울 하고도 구석진 은평구, 서부경찰서 뒤편 서른평 남짓한 공간에 자리잡았다. 은평구에 홀로 둥지를 틀었으니 주인장이 시대착오적이거나 특별한 뜻이 있지 않겠는가.
주인장은 윤성근(40)씨. 2002년 잘나가던 아이티(IT) 기업을 그만뒀다. 어느 날 문득 신발이 가득한 신발장을 보고 스스로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년 넘게 살아온 날들이 기껏 운동화 모음이라니. 이러려고 취업을 했단 말인가. 두번째로 택한 직장이 출판사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기에 책을 만들고 싶었던 것. 하지만 책을 태어나게만 할 뿐 의미를 찾지 못했다. 진짜 책을 찾아서 헌책방 점원이 되었다. 그곳은 책을 쌓아놓고 관리를 하지 않았다. 차라리 나만의 헌책방을 내자며 2007년 응암동 지하실을 찾아든 것이 이상북이다.

여기서는 주인장이 읽은 책만 판다. 정독하는 것도 있고 건너뛰는 것도 있다. 한달에 200~300권의 새 헌책이 들어온다. 그것들은 문학, 역사, 마르크시즘, 젠더, 환경, 생명·평화, 장르문학 등으로 분류되어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힌다. 어떤 것은 1000원짜리 코너에 ‘득템’용으로 들어간다. 수장가용 책장에 모셔지기도 한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맨발의 세계일주>, <노란 손수건>, <일식>, <새벽길>, <슬픔이 기쁨에게> 등 1970년대가 상한이다. 특별히 주인장의 관심을 끈 책들은 ‘잘생긴 주인장 추천도서’ 책장에 꽂힌다. <마찌니평전>, <장자철학>, <릴케>,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서양의 지적전통>, <미술과 시지각>, <을병연행록>, <빛의 도시>, <히드라>, <역사를 위한 변명>, <현산어보를 찾아서> 등.
결국 한달에 200~300권의 책을 읽는 셈이 되는 윤씨는 다독의 결과를 묶어 자기 책을 네권이나 펴냈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심야책방>, <침대 밑의 책>,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등 네권인데, 이태마다 한권씩 낸 셈이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이상북은 헌책방이자 윤씨의 서재다. 수년 동안 모은 루이스 캐럴의 저작, 특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국내외 판본 수백권이 손타지 않게 높다랗게 꽂힌 것도 그렇고, 루이스 캐럴의 어록 “그림도 없는 책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로 벽을 장식한 것도 그렇다. 컴퓨터를 놓고 책으로 둘러친 윤씨의 전용공간 외에 손님용 탁자와 의자가 마련돼 있다. 한두개도 아니고 곳곳에 다양한 모양새다. 자기만의 공간을 좋아하는 책쟁이들을 위한 배려다. 막독모임은 윤씨가 만든 둥지에 자연스럽게 깃든 것이다. 손님 가운데 주인장 또래이자 이 동네에 사는 이시욱씨가 자연스럽게 진행자가 되었다.

특이하게도 한쪽 구석에 무대가 마련돼 있고, 빈 벽에 빔 프로젝터 스크린이 걸려 있다. 저건 뭐지? 궁금하면 매월 둘째, 넷째 금요일 밤에 가보시라. 평소 오후 3시부터 11시까지 열지만 이날은 새벽 6시 첫차가 다닐 때까지 밤샘개방 한다. ‘심야책방’이다. 이때는 공부방이 없는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하고, 도서관이 멀고 카페가 시끄러운 직장인들이 글쓰기를 한다. 싸온 밤참을 두고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때론 판소리꾼, 연극배우, 가수 등 ‘딴따라들’을 초청해 공연을 한다. 이곳 무대에 시험 삼아 올린 연극이 진화해 홍대 소극장으로 진출하기도 한다. 독립영화도 튼다. 직전에 튼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은 헌책방에서 보는 헌책방 이야기라 흥미로웠다. 다음에는 <카페 뤼미에르>다. 상영작은 윤씨가 정하는데, 그것이 성에 차지 않는 열 사람이 모이면 다른 작품을 볼 수도 있다.

이런 특별한 수요를 위해 일요일, 화요일은 책방이 문을 닫고 행사용으로 할애한다. 핸드드립 커피 강좌가 그런 예다. 흥이 많은 주인장은 2011~2012년 이곳에서 25차례 인터넷 라디오방송을 했다. 옛 출판사 동료이자 동네주민인 이종훈(부엉이)씨와, 때로는 초청손님과 함께 액션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음식, 1990년대 유행 가요 등을 소재로 수다를 떨었다. 아이튠스 팟캐스트에서 문화예술 분야 10위권에 들기도 했다. 대안학교인 은평 씨앗학교 교사가 되는 날도 이런 날이다.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의 집무실을 헌책방 스타일로 디자인해준 이도 윤씨다.

향 싼 종이에 향내 난다던가.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주인을 닮아 조금 벌어 조금 쓰는 사람들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판에 ‘사람 사이’가 그리운 사람들이 모여 서로 온기를 나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