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10-22 12:05
[기록이 없는 나라]<1>주요 국가기록이 없다
세계일보 2004년 5월 31일

<세계일보 참여연대 공동기획>
◆특별기획취재팀=채희창, 박병진, 주춘렬, 김형구, 이우승기자(specials@segye.com)


<1-1>국가기록이 사라졌다

세계일보-참여연대 공동기획

1950∼93년 주요정책등 150건 선정 실태조사

‘국가기록을 방치하는 나라.’ 중요한 공공기록이 국가의 무관심과 일부 특권층의 조직적 폐기 등으로 인해 사라지고 있다. 역사의 흔적이 지워지는 것이다. 기록과 역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기준도 불명확한 탓이다. 그러나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에 세계일보는 정부의 기록 작성 및 보관, 폐기에 이르는 전과정을 정밀추적해 시리즈(9회)로 연재한다. /편집자주

국가 기록 관리에 큰 구멍이 나 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취임사(1979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선언문’(87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쌀 개방 대국민 사과문(93년) 등 통치사료 상당수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또 청와대 앞길 및 인왕산 개방과 아시아나 항공기 해남 추락사고(〃), 법관 200명이 대법원 전면개편 서명운동을 벌인 사법파동(88년) 등 정책·사건 기록문서도 남아 있지 않다.

세계일보가 1950년부터 1993년까지 주요 역사·정책·사건과 대통령 통치 관련기록 150건을 선정, 국가기록원(옛 정부기록보존소)을 통해 보존 실태를 조사한 결과 106건(70%)은 기안과 결재, 집행문서(사건보고서 포함)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106건 중 70건은 아예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고, 36건은 국무회의록에 짧게 언급되거나 국무회의 안건 목록 또는 관계법령철 등에 제목만 남아 있었다.

역사 기록인 경우 ‘6·29 선언문’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신설(80년) 등 표본 35개 중 12개는 기록 자체가 없었다.

정책 기록은 45건 중 ▲서울평화상 제정(89년) ▲연좌제 폐지(80년) ▲모스크바올림픽 불참(〃) 등 18건의 흔적이 없었다.

사건 기록은 국가정보원, 검찰·경찰청에서 이관하지 않은 것이 대다수였다. 이런 탓에 40개 표본 중 기록이 없는 것이 26개에 달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76년) ▲김대중 전 대통령 피랍사건(73년) ▲정인숙양 피살사건(70년) 등이 꼽혔다.

대통령 관련기록은 30건 중 14건이 없었다. ▲노 전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정상회담(90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의 공동성명서(67년) 등도 없었다. 49년 정부 수립 직후 정부 처무 규정에 따라 대통령과 국무총리 재가문서는 영구기록으로 지정해 보관토록 규정했으나, 지켜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기록을 보존해 공개할 만한 역사적 정통성을 갖지 못했고, 문서 보존 인식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반면 외국은 대통령 전화통화 기록과 이메일 내용까지 보존된다. 명지대 기록관리학과 김익한 교수는 “대통령들이 기록물을 사유화했고 정치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 통치·정책 기록을 폐기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150건 어떻게 선정했나>

세계일보 취재팀은 주요 사건 연감(年鑑)과 일지를 포함, 매년 언론사가 선정하는 10대 뉴스를 일일이 대조해 1950∼93년의 주요 정책과 대형 사건·사고 150건을 선정해 국가기록원에 보존 여부를 의뢰했다.

국가기록원의 직원 3명이 4일 동안 확인작업을 벌였다. 보존서류 목록에 해당 기록이 있는지를 검색했고 담당 부처가 그해 생산한 문서목록과 다시 대조하는 방식으로 확인했다. 취재팀은 대외관계나 외교문서는 국가정보원과 외교통상부 등에 보관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이들 기관을 상대로 별도의 확인작업을 거쳤다.

<1-2>주요 국가기록이 없다

美군정期 문서 단1건도 남지 않아

‘주요 국가 기록물은 어디로 사라졌나’
세계일보 취재팀은 국가기록원과 국가정보원, 통일부 등 주요 국가기관을 상대로 1945∼93년 사이에 있었던 150개 주요 국가정책과 대형 사건사고의 기록물 보존 실태를 취재한 결과, 대부분의 기록이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가 제대로 검증돼 쓰여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실제로 해방 이후 발생한 주요 정치적 사건과 경제개발계획 관련문건 등 주요 정책문서들이 대부분 소실 또는 폐기됐기 때문이다.

기록물 관리와 보존에 큰 구멍이 뚫린 셈이다. 이는 국가가 기록물 관리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은 한마디로 국가 차원의 통합적인 기록물 관리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정기 문서 하나도 없다=해방 후 48년 정부 수립때까지의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미 군정과 남한 과도정부, 과도 입법의원 등에 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3년은 남북 분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등 현대사를 결정짓는 시기이지만 시대상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국가기록원 이승억 학예연구사는 “국가기록원에는 없고 다른 기관에도 보존 가능성이 희박해 사실상 기록이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해방후 실시한 첫 농업정책인 농지개혁 문서가 사라진 것도 어처구니없다. 농지개혁 조치는 해방 후 일제의 봉건적 지주 소유관계를 청산하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음에도 불구, 당시 정책수립 관련 문서와 보고서류 등이 전혀 없다.

◆사라진 6·29 선언문=독재정권에 항거해 들불처럼 번진 87년 민주화운동이 만들어낸 6·29 선언문을 비롯한 관련문서가 없다는 것은 국가기록 관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6·29 선언만이 아니다. 미묘한 정치적 사건 관련기록들은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최대의 정·관계 스캔들을 촉발시킨 정인숙 피살 관련서류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국가기록원의 설명이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한 73년 일본 도쿄 피랍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내란음모사건도 당시의 판결문 1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 사건의 실체를 학술적으로 연구하거나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봉쇄된 것이다. 정치적 사건뿐만이 아니다.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 사건·사고 기록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껍데기뿐인 정책·사건 관련기록=정부의 행정정책 기록물이 없는 것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법령공포 원안이나 인사발령 대장 등 극히 공식적인 문서를 제외하고는 실제 추진내용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즉 법령과 인사를 통해서 공무원이 실제 수행한 정책관련 기록물이 없기 때문에 과거 정부가 추진한 수많은 정책들에 대한 분석과 평가, 재활용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61∼65년 사이 경제개발계획 수립 초기 개발 방향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일부 집행문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68년 대학입시 예비고사 실시, 77년 부가가치세 신설 등 정책에 관한 서류는 당시 국무회의 안건목록에만 있을 뿐 관련서류가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검찰, 경찰에서 생산한 사건관련 서류들이 전혀 이관돼 보관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당 사건, 60년대 한일회담 반대시위 운동, 민청학련 사건 관련 일체의 신문조서들이 남아 있지 않아 사회적 논란과 분열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임기종료와 함께 통치사료 증발

1993년 이전의 통치기록 상당수가 사라졌다는 것은 무단 폐기되거나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는 얘기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수석실에서 작성한 정책관련 조사 및 검토보고서도 대부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대통령과 청와대 기록이 ‘사료’로서 갖는 의미를 감안하면 사실상 통치자들이 ‘기록 없는 나라’를 조장해 왔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셈이다.

◆통치사료가 증발됐다=현재 국가기록원(옛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된 역대 대통령 기록은 모두 27만8000여건. 2001년 1월 미국 아칸소주 수도 리틀락 시에 있는 임시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된 클린턴 대통령의 기록물(7680만쪽의 문서기록물과 185만장의 사진, 7만5000개의 박물)보다도 적은 양이다. 문제는 기록의 질이다.

역대 대통령이 남긴 기록은 박정희 대통령을 제외하곤 대부분 법률시행 재가문서나 시청각자료가 고작이다. 국가의 중요 정책을 추진, 결정하는 데 있어 그 배경을 알 수 있는 통치자료는 거의 없다. 대부분 임기 말에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를 폐기했기 때문이다. 취재팀의 확인 결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경우 재임 기간 정국을 뒤흔들었던 ‘국민방위군 사건(51년)’과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건(58년)’, 3·15 부정선거(60년)’등 주요 사건의 관계기관 대책협의 기록물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8개월을 재임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79년 취임 당시 ‘취임사’조차 없는 상태였다.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 기록이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돼 왔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각각 3만8521건과 3만9015건이 보관된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은 통치기록 중 유독 역사의 ‘오점’으로 평가된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닮은 꼴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권력을 움켜잡았지만 당시 회의록은 남아 있지 않고, 장기집권의 토대를 닦았던 ‘3선 개헌’(69년)과 ‘10월유신’(72년)도 단행 배경이 적힌 문서가 남아 있지 않았다.

남다른 기록열로 유명했던 전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날 때 트럭 서너대 분량의 통치기록을 집으로 가져갔다. 이로 인해 군사독재의 상징으로 각인된 80년 당시 ‘삼청교육’과 ‘학원 정화’, ‘언론 통폐합’ 등의 추진 배경을 살필 수 있는 관련기록이 모두 사라졌다. 또 정권 창출의 기폭제였던 ‘국보위(80년)’ 관련자료도 고작 국보위 현판과 관인대장만 남아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러시아 수교와 남북합의서 교환 등 공식문서는 더러 있었으나 청와대 수석실에서 올린 보고서는 드물었다. 심지어 9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관련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관련 기록에는 대통령 비서실 재가문건이 의외로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알려진 대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사태와 관련, 사후보고서는 있었지만 발생원인 및 대책강구 등에 관한 보고서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름뿐인 통치사료 보존 규정=국가기록원은 지난해 2월에야 건국 이후 최초로 대통령 기록을 체계적으로 인수했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인수한 통치자료는 모두 15만7580건이었다. ‘대통령 기록을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해야 한다’고 규정한 ‘정부공문서 규정(87년)’이 생긴 지 16년이 흐른 뒤였다.

이는 한국현대사에서 대통령 통치사료가 사실상 개인용 기록처럼 간주돼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대통령 비서실에서 생산된 중요 기록들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유실되거나, 이 가운데 일부는 비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유통되기도 했다.

통치기록의 국가기록원 이관을 법으로 처음 규정한 공공기록물관리법(2000년 시행)의 허점도 적지 않다. 이 법 시행령 28조는 ‘차기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자료를 청와대에 비치·활용·선별할 권한이 있다’고 명시했다. 다시 말해 청와대 비서실에서 “놔두고 보겠다”고 하면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할 수 없는 셈이다. 김한욱 국가기록원 원장은 “과거에는 통치사료 보관 여부가 오로지 대통령의 손에 달려 있었다”며 “새로 짓는 성남서고에 들어설 대통령기록관에 전시할 기록물 수집을 위해 역대 대통령들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1-3> '조선왕조 5백년' 저자 신봉승씨

"정부가 기록 남기지 않는것은 후세에 중대과오 저지르는 것”

"국무회의 발언내용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것은 고위관료들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풍토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공직자 자격이 없습니다.”
대하소설 ‘조선왕조 5백년’ 저자이자 방송 시나리오 작가인 신봉승씨(70)는 정부가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는 것은 후세에게 엄청난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예를 들어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들이 발언한 내용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꼬집었다. 진보 진영의 공세를 의식해서 발언록을 남기지 않는 것은 사회지도층이 될 자격이 없다고 공박했다.

“조선왕조 500년 기록은 한마디로 완벽합니다. 왕의 발언은 물론 관료들이 왕을 공격한 내용까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사관들은 모든 회의에 참석해 사실대로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예들이 오늘날 왜 이렇게 추락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그는 안타까워했다.

그는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드라마가 나갈 때의 일화를 예로 들었다. “당시 모씨 종친회에서 자신들의 조상이 드라마에 나온 것 같은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항의하며 제작을 방해했다. 이에 종친회 대표들을 불러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내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고 말했다. 완강하던 대표들도 기록을 직접 들여다보고는 기세가 누그러졌다고 한다. 그만큼 조선왕조실록은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일화도 소개했다. 강 전 총리 입각후 첫 국무회의를 열 당시 청와대 비서들이 배석한 것을 보고 “국무위원이 아닌 분들은 나가 달라”며 퇴장시켰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해 그 당시 기록을 찾아봤더니 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강 전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직접 물었더니 ‘허허’하고 웃더라는 것. 기록이 없어 야사(野史)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정부 기록은 역사인 동시에 국민들에게 규칙을 정해주는 것입니다. 대통령중심제니 만큼 노무현 대통령이 나서서 기록을 제대로 남기라고 지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고 충고했다.

<조선왕조실록이란…>

王주변 모든 사실 기록…97년 세계기록유산 지정

조선 태조때부터 철종때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사서(史書). 1997년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국보 제151호. 1893권 888책으로 이뤄져 있고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다.

사관은 사초(史草)를 바탕으로 임금 주위에서 일어난 모든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고 때로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라 과감하게 비판했다.

사관이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실록을 편찬할 수 있도록 임금은 전대의 실록을 전혀 볼 수 없도록 했다. 왕조실록 편찬은 대개 전왕이 죽은 후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이뤄지는데, 춘추관 내에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에서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