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10-22 12:11
[기록이 없는 나라]<2>현장르포 : 누더기 된 국가기록
세계일보 2004년 6월 1일

<세계일보 참여연대 공동기획>
◆특별기획취재팀=채희창, 박병진, 주춘렬, 김형구, 이우승기자(specials@segye.com)


[기록이 없는 나라-현장르포]누더기 된 국가기록

곰팡이 슬고… 찢어지고…쓰레기 취급

세계일보-참여연대 공동기획

국가 행정기관의 기록물 관리실태를 추적하기 위해 세계일보 특별기획취재팀과 참여연대 투명사회팀이 공동 현장조사에 나섰다. 지난달 21일과 25일 두 차례 실시한 이번 현장조사 대상 기관은 서울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의 교육인적자원부·행정자치부와 정부과천청사의 보건복지부·환경부·법무부·노동부 등 6개 기관이었다. 중앙 행정부처가 ‘통제구역’으로 지정돼 있는 문서고를 외부에 공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편집자주

“솔직히 기록물 문서고는 그냥 ‘창고’라고 알면 됩니다.”(정부과천청사 모 행정부처의 기록물담당 공무원 K씨)

취재팀과 참여연대가 확인한 기록물 보관현장은 우리나라 기록물 관리시스템의 총체적 난맥상을 단적으로 대변했다.

국가기록물 곳곳에 곰팡이가 슬어 부스럭거렸고, 누렇게 탈색된 기록물들은 아예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돼버렸다. 국가 대계(大計)가 고스란히 적혀 있을 기록물들은 창고 기능으로 전락한 문서고 한귀퉁이에서 이처럼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1. 곰팡이 핀 행정자치부 기록물

지난 21일 서울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의 행정자치부. 행정자치부 문서고를 찾기 위해 지하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마자 습기 가득한 음지 특유의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20평 넓이의 문서보존실을 열어보니 빨간 노끈으로 묶어놓은 각종 서류뭉치들이 쌓여져 있었다.

1960∼70년대에 만들어진 기록물 상당수는 기록물 가장자리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찢어지거나 너덜너덜해졌다.

“지하 문서고에 환풍기조차 없다는 건 기록물을 죽이는 범죄행위나 다름없다”는 참여연대 전진한 간사의 지적에, 담당 공무원은 “다른 행정기관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행자부 문서고엔 보존기간이 ‘영구’나 ‘준영구’로 분류된 기록물이 상당수였다. 사료적 가치가 높은 이들 기록물이 해당 기관에 보관돼 있다는 것 자체가 기록물관리법 위반이다. 67년 자연공원과에서 생산된 기록물엔 보존기간이 ‘영구’라고 적힌 글씨가 뚜렷했다. 이런 기록물이 어림잡아도 100권은 넘어보였다. 국가기록물 관리의 모범이어야 할 행자부부터 기록물관리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셈이다.

#2. 도서실 구석의 교육부 문서고

전 간사와 함께 교육부 문서고를 찾았다. 교육부는 아직 정식 ‘자료관’을 갖추지 못했다. 자료관은 기록물만 단순 보관하는 ‘문서고’보다 한차원 높은 혁신적 시스템으로, 해당 기관에서 생산된 기록물을 수집·보존·분류하는, 기록물 관리의 ‘종합 터미널’이다. 교육부는 정식 자료관이 아닌, 일반 ‘자료실’(간행물 등을 보관하는 일종의 도서관)에 불과한데도 ‘자료관’이란 문패를 버젓이 달고 있었다

자료실 한구석에 초라하게 자리잡은 문서고는 모빌렉(이동식 보관시설) 시설 16개가 전부였다. 모빌렉에 꽂힌 노란색 파일의 기록물은 대부분 ‘보존기간’이 적시되지 않은 상태였다.

#3. 쓰레기자루 쌓인 복지부 문서고

지난 25일 정부과천청사에 위치한 복지부의 기록물담당 직원을 찾았다. 그는 처음부터 “지난해 말 배치됐지만 기록물관리법 내용도 잘 모른다”고 시인했다.

다른 부처와 마찬가지로 복지부 문서고도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는 지하 1층에 있었다. 문서만 따로 보관한 15.5평의 제2문서고. 오른쪽 구석에 노란 자루 6∼7개가 우선 눈에 띄었다. 폐기처분된 기록물들이 자루에 담겨진 채 문서고 한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황당한 모습이었다.

종이 기록물의 최대 적은 ‘습기’다. 전 간사가 “문서고엔 항온·항습기를 갖추도록 돼있는데 왜 없느냐”고 묻자 “2000만원 정도 든다고 해서 그냥 포기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복지부 문서고에도 영구 기록물과 준영구 기록물이 수두룩했다.

#4. 잡무에 시달리는 기록물 직원

노동부의 1명뿐인 기록물관리 담당 직원은 “서무로서 맡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 기록물 관리는 신경도 못 쓴다”고 말했다. “말이 좋아 서무지, 식목일 행사며 국정감사 자료정리며, 월례회의때 책걸상 나르는 일까지 온갖 잡무는 다 제가 합니다. 담당직원이라고 저 하나인데, 기록물 관리업무는 아예 손댈 수가 없죠.”

지하 1층에 자리잡은 29평짜리 노동부 문서고 역시 ‘창고’였다. ‘제한구역’(공무자외 출입금지)이라는 빨간색 푯말이 내걸린 서고에는 크고 작은 상자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일부 서류뭉치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특히 70년대 근로기준법 관련 ‘준영구 보존’ 문서들은 위 아래가 뒤집힌 채 꽂혀 있었다.

#5. “결국 의지문제죠.”

환경부 문서고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최근 3000만원 정도 들여 서고내 철제 앵글을 현대식 이동서고(모빌렉)로 교체하고 환풍 시설도 보수했다. 담당 공무원은 “결국 책임자들이 어떤 의지를 갖고 있느냐가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90년대 생산된 기록물의 분류번호와 보존기간이 명시되지 않는 등 체계적인 관리가 안 되고 있는 점은 환경부 역시 여느 부처와 다를 바 없었다.

보존기간이 적혀 있지 않다는 건 그 기록물의 ‘중요도’가 제대로 분류되지 않았다는 뜻이고, 이는 곧 의미있는 기록물이 무단 파기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법무부 문서고는 엉뚱하게도 농림부 건물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무실 공간 부족에 따른 ‘궁여지책’이었다는 게 담당 사무관의 설명이었다.

<2-2>폐지공장 방불…소중한자료 썩어가

"기사 나가면 우리는 죽는다" 직원 항변 아직도 머릿속에
전진한 참여연대 간사 동행기 (세계일보-참여연대 공동기획)

‘충격과 공포’.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세웠던 작전명이다. 하지만 필자는 세계일보 취재팀과 함께 우리나라 행정기관의 기록물관리실태를 직접 확인하며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가장 먼저 서울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의 교육인적자원부를 방문했다. 우리가 문서고를 찾아가자 담당자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문서고가 몇 평인가요?” “아 그게… 아주 열악해요. 10평쯤 됩니다.”

필자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1년에 20조원이 넘는 예산을 쓰는 교육부의 문서고가 단 10평이라니…. 더구나 문서고는 일반 서적이 전시된 자료실(일종의 도서관) 한귀퉁이에 위치했다. 기록물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보관상태도 매우 열악했다. 보존기간별로 묶은 것도 아니고 온갖 기록물들이 별다른 분류기준 없이 방치돼 있었다. 문서고에서는 필요한 기록물을 언제라도, 즉시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능은 애초에 기대하기 어려웠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기록물관리와 정보공개를 총괄하는 행정자치부. 지하 1층에 있는 문서고에 들어섰다. 주위에는 각종 창고와 기계실이 몰려 있어 불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이런 불결한 환경에 문서고가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문서고를 보고는 아연실색했다. 창문과 환풍기 하나 없는 공간, 만지면 으스러질 것 같이 파손된 기록물들, 곳곳에 핀 곰팡이, 축축한 느낌, 어지럽게 널브러진 각종 자재들. 분노와 함께 서글픔이 밀려왔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기록물을 살펴봤다. ‘보존기간 영구 및 준영구’라고 버젓이 찍힌 기록물의 표지는 걸레가 된 채 찢겨져 있었다. 책 내용물은 곰팡이가 덕지덕지 붙은 채 나뒹굴고 있었다. 영구 및 준영구 기록은 기관 내에서 9년 보관하고 국가기록원에 넘겨야 한다. 하지만 30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기관에 방치된 기록들이 수없이 많았다. 우리나라 정부 행정이 기록된 소중한 자료들은 폐지공장에서나 볼 수 있는 상태로 썩어가고 있었다. 노동부, 법무부, 보건복지부 등 다른 기관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록물은 모빌렉 하나 없이 철제 앵글에 방치되고 항온·항습시설이 없어 습기에 그대로 노출됐다. 기관의 규모에 비해 문서고는 너무나 협소했다.

기관들의 항변은 하나같았다. 기록관리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 기록관리 업무를 맡기 싫어하고 혹시 맡더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한다고 한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에게 체계적인 기록물 관리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환경부는 나름대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서무계장의 노력으로 지하 문서고에 방치된 문서를 정리하고, 자투리 예산으로 모빌렉을 설치했다. 계장 한 명의 노력으로도 이런 시설을 갖춘 만큼 장·차관들이 관심을 가지면 더 체계적으로 기록물을 관리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실태조사를 하면서 그동안 기록물 개혁운동을 해온 활동가로서 심한 모멸감이 밀려왔다.

모 부처 직원의 항변이 아직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런 기사 나가면 우리만 대책문건 만드느라 죽어납니다. 근본적 대책없이 담당자들만 혼나죠.” 이 말 한마디가 기록물 관리가 안 되는 이유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