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6-02 17:15
파주 ‘지혜의 숲’ 실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4060201033030023002 [319]
최현미/문화부 차장

책의 죽음을 본 적이 있는지.

특별히 책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책의 죽음’을 직접 목격할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책의 죽음’이란 요즘 자주 거론되는 인문학 위기, 출판 위기에 따른 상징적 ‘책의 죽음’이 아니다. 기획, 집필, 편집, 교정, 디자인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세상에 태어난 책이 말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죽음이다.

필자도 궁금해 알아봤더니 꽤 참혹했다. 출판사들은 시중에 유통시킨 책이 여러 이유로 반품돼 들어오면 책 귀퉁이에 찍힌 서점 도장을 절삭기로 2∼3㎜씩 잘라 재출고한다. 하지만 이들이 다시 반품돼 돌아오면 사망 처리될 위기에 처한다. 창고비용도 적지 않아 안 팔리는 책을 언제까지 쌓아둘 수도 없다. 일단 사망선고가 내려지면 책은 ㎏당 무게로 달아 처리 전문업체에 넘겨진다. 이때 먼저 책등을 쳐내 묶여 있던 책이 낱장으로 흩어지게 한다. 이어 흩어진 낱장 더미는 화학약품이 담긴 수조에 던져진다. 책이 더 이상 지식이나 시대 정신, 세세한 정보와 재미의 전달자가 아니라 폐지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안타깝게도 동시대조차 견디지 못하고 절명한 것이다.

책이 이처럼 처참하게 단명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서관이다. 기원전 3000년, 고대 근동에서 처음 등장할 당시 머릿속 기억에만 의존하던 정보와 지식을 영구히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한 도서관은 빠르게 변하는 시대속에서 그 역할이 다양해졌지만, 여전히 ‘사회적 기억장치’가 중심 역할이다.

이 사회적 기억장치가 아름다운 실험을 한다. 19일 경기 파주 출판도시 내에 문을 여는 도서관 ‘지혜의 숲’이다. 출판도시문화재단이 만든 도서관은 365일, 24시간 문을 연다고 한다. 국내 주요 출판사 30여 곳, 학자·교수 등 개인 20여 명과 국립중앙박물관 등 140여 기관이 50여만 권을 기증했고, 이중 20여만 권이 우선 비치돼 있다. 지혜의 숲이 ‘아름다운 실험’인 이유는 24시간 개방도 개방이려니와 사서도, 관리 직원도, 도난방지 시스템도 없기 때문이다. 평소 책을 좋아하는 자원봉사자 30여 명이 권독사라는 이름으로 안내를 맡지만, 바닥부터 천장까지 꽂혀 있는 2600여 평 규모의 도서관을 지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책의 훼손이나 더 나쁜 경우 도난이 걱정되지만 도서관 측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예산 등의 이유로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도서관 측은 최악의 경우 훔쳐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우려하면서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이 공간을 아끼고 가꿔서 진정한 ‘지혜의 숲’이 되는 풍경을 보고 싶다고 했다. 이 위험한 실험이 성공할 수 있을까. 이용객들이 도서관의 선한 의도대로 책과 도서관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인가.

선의는 선의로 응답받을 때 완성된다. 선의가 나중에 음모로 드러나거나, 악의나 배신으로 돌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한 어지러운 세상에서, ‘책의 숲’에서만이라도 선한 의도로 내민 손을 선한 의지로 잡아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싶다. 그렇게 우리 시대 위기에 처한 책이 품위있게 생명을 연장하기를 바란다.

- 문화일보 201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