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6-04 10:00
[세상에 말걸기-서윤경] 책장에 꽂힌 ‘그 책’ 세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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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취재했다. 한 권의 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1997년 출간 당시 정가인 6500원을 주고 구매한 책을 또 산 것이다. 취재를 끝낸 뒤 책장엔 똑같은 책 세 권이 나란히 꽂혔다. 헌책방을 뒤져 산 두 권 중 한 권은 정가에 버금가는 6000원에 샀다. 다른 한 권은 2000원이었다.

바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였다. 이 회장과 관련된 책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가 직접 쓴 것은 이 책이 유일했다.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운 이 회장이었지만 글에선 자신의 경영 철학이나 일상의 얘기를 담담히 풀어냈다.

프랑스 철학자 뷔퐁은 ‘글은 곧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글은 자신을 드러내는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리더의 글은 글 이상의 힘을 갖고 있다. 지난 2월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대통령의 글쓰기’란 책을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소 리더가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리더는 글을 자기가 써야 한다. 자기의 생각을 써야 한다. 글은 역사에 남는다. 다른 사람이 쓴 연설문을 낭독하고, 미사여구를 모아 만든 연설문을 자기 글인 양 역사에 남기는 것은 잘못이다. 부족하더라도 자기가 써야 한다.”

그래서일까. 세계적인 리더들은 글쓰기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페이퍼 파워’를 과시한다. 페이퍼 파워란 문서 책 신문 논문 등 ‘페이퍼’의 영향력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높이거나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말한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주로 세계 최고 부자이자 자선 사업가인 빌 게이츠는 ‘빌 게이츠@생각의 속도’ ‘미래로 가는 길’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썼다.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도 직접 책은 쓰지 않았지만 막강한 페이퍼 파워를 갖췄다. 바로 프레젠테이션(PT)과 연설문을 통해서였다. 저술 작업에 참여한 그의 유일한 자서전 ‘스티브 잡스’도 출간과 동시에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켰다.

이 회장의 에세이는 지난달 10일 밤 이 회장이 호흡곤란 증상으로 응급실로 간 뒤 인터넷을 중심으로 프리미엄 가격이 붙었다. 그가 쓴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

헌책방 주인들은 이 책이 절판된 상태라 공급은 없는데 수요는 늘어날 것이라며 책 가격이 더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이미 인터넷에선 정가보다 3배 가까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인터넷엔 눈길을 끌 만한 글들이 올라왔다. 이 책의 가격이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병상에서 일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풀어낸다면 더 이상 에세이 가격은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여전히 삼성공화국, 황제 경영 등의 이미지 때문에 삼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이 회장의 기억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삼성의 글로벌 신화를 이끈 이 회장만의 경영 노하우를 사유화하기엔 아깝다는 것이다. 아마 이 회장도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자신의 에세이 속 ‘기록 문화’에 그 답을 적어놨기 때문이다.

“끈기 있게 생(生)데이터를 모아야 한다. 그것이 중요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훗날 판명되며 역사의 차이는 곧 기록의 차이다. 데이터 경험 역사. 이것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것이다.”

감히 말한다. 책장에 꽂힌 똑같은 책 세 권이 헌책 가격인 2000원에 계속 팔리기를.


-국민일보 201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