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7-08 11:22
[책의 미래를 묻다] 독자 취향 좇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 보여줄 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7/08/2014070800012.htm… [366]
[3] 獨 주어캄프의 토마스 슈파 대표

헤세 등 노벨 문학상 12명 배출… 무지개 총서로 유럽 지성 이끌어
"독서의 敵은 도서의 낮은 품질… 작가에게 시간 줘야 좋은 책 나와"
"드라마에는 희망의 불꽃이 있어야 하고 등장인물 중 적어도 한 명은 사회의 진보를 믿는 낙관주의자여야 한다"고 극작가 아서 밀러는 말했다. 1950년 창업한 독일 주어캄프(Suhrkamp)는 20세기 서구 지성계에서 그런 역할을 한 출판사다. 헤르만 헤세, 베르톨트 브레히트, 발터 베냐민, 테오도어 아도르노, 위르겐 하버마스…. 주어캄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12명이나 배출했고 68혁명과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비롯해 사상적 흐름까지 이끈 문학과 지성의 기관차였다.

이 출판사는 2010년 프랑크푸르트 시대 60년을 마감하고 베를린으로 이사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창업자 페터 주어캄프(1891~1959), 2002년 사망한 후계자 지그프리드 운젤트에 이어 주어캄프를 맡은 부인 울라 운젤트-베르케비치는 적자가 쌓이며 경영권 분쟁에 시달렸다. 베를린으로의 이주는 문화 중심지이면서 물가는 싼 도시에서 재도약을 모색하는 시도로 비쳤다. 하지만 주어캄프는 지난해부터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지난 6월 5일 베를린. 주어캄프 출판사는 포츠담 광장에서 지하철로 열 정거장 떨어진 에버스발데 슈트라세 역 앞에 있었다. 토마스 슈파(Sparr·58) 주어캄프 대표는 "법정관리 상태지만 주어캄프 출판 철학은 달라지지 않았다"며 "빠른 원상회복을 자신한다"고 말했다.

―주어캄프 출판 철학이란?

"작가에게는 시간을 줘야 한다. 그래야 품질을 기대할 수 있다. 주어캄프는 책을 찍어내는 곳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세계로서의 작가를 세상에 내놓는다."

―주어캄프는 지성계의 거대한 뿌리와 같았다. 경영권 다툼과 법정관리는 한국 출판계에도 충격으로 다가온다.

"61% 지분을 가진 울라 운젤트-베르케비치와 39%를 확보한 기업가 한스 발락 사이에 소유권 분쟁이 길었다. 법정관리는 주어캄프를 살려내기 위한 해방전쟁과 같다. 구조조정을 통해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주식을 상장하면 출판사 자산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책이 특별한 상품이라고 생각하나? 빅 데이터 시대에 종이책은 왜소해지고 있다.

"책은 콘텐츠를 담고 있기 때문에 특별하다. 연극이나 오페라를 품는 극장과도 같다. 책은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문화적 자산이다. 전자책이 점점 더 팔리겠지만 갑작스럽고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 것이다."

―문학과 철학이 왜 필요한가?

"그 질문은 '세상에 속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다. 문학과 철학은 무엇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하는지 일러준다. 대중이 문학과 철학을 덜 읽는다는 것은 편견이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들은 그것을 더 읽고 싶어 하며 궁금해한다. 문학과 철학은 자유에도 기여하고 있다."

직원 152명의 주어캄프는 절판되지 않고 살아 있는 출판물이 7000종에 이른다. 올해는 신간 200종을 낸다. 지난해 매출은 약 3000만 유로(412억원). 한국문학에 대해 묻자 그는 "한국과 독일은 분단, 폐허, 상처, 놀라운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한국문학을 잘 알진 못해도 공감대가 넓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오프라인 서점이 붕괴하고 있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면 되니까 독자에겐 아무 문제가 안 되나?

"심각한 문제다. 중간 규모의 서점, 개인이 운영하는 서점은 출판사는 물론 독자에게도 소중하다. 그들만의 취향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온라인 서점으론 대체가 안 된다. 서점은 문학·과학·철학이 독자와 접촉하는 공간이며 사회적 자산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일에는 책 할인 판매가 있나?

"정가(定價)에 팔지 덤핑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프라인 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이나 책값은 똑같다. 할인은 출판사 자체 행사 등으로 제한된다."

―그동안 가장 사랑받은 작가는? 주어캄프의 선구안도 궁금하다.

"헤르만 헤세와 베르톨트 브레히트. 판매 동향을 보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주어캄프는 새롭고 가치 있는 글을 쓰는 작가를 발굴한다."

슈파는 '출판의 적(敵)은 스마트폰'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독서의 적은 늘 있어 왔는데 교육 부족, 책의 낮은 품질이 문제"라고 지목했다. 마지막으로 '주어캄프는 독서 트렌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고 묻자 돌직구가 날아왔다. "우리는 독자를 따라가지 않는다. 이끈다. 독자가 처음엔 읽고 싶지 않았던 책을 발견하게 해야 한다. 새로운 세계를."

나치가 장악한 1944년 독일에서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출간해 옥고를 치른 페터 주어캄프는 종전 후 195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주어캄프를 창업했다. 헤세, 브레히트를 비롯한 많은 작가가 그를 따라 주어캄프로 출판사를 옮겼다. 주어캄프 총서, 주어캄프 비평서(일명 무지개총서), 주어캄프 문고판, 주어캄프 학술문고 등을 펴내며 독일과 유럽의 문학·지성사를 이끌어 왔다.

-조선일보 201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