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10-22 12:37
[기록이 없는 나라]<6>특수기관은 기록 '사각지대'
세계일보 2004년 6월 5일

◆특별기획취재팀=채희창, 박병진, 주춘렬, 김형구, 이우승기자 (specials@segye.com)


<6-1>특수기관은 기록 '사각지대'

'힘있는' 부처 문서관리 제멋대로

국가정보원과 통일부 등 특수기록물 및 특수자료관 설치 기관은 기록 관리의 무풍지대였다. 기록 관리와 보존의 투명성을 담보할 시스템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경우 국정원법을 내세워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며 외부 간섭을 가로막고 있다. 보관 중인 기록 목록이나 보존서고의 크기조차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기록의 체계적 관리와 이들 기관에 대한 지도 점검을 기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후대에 남겨야 할 기록유산이 특정 기관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있는 셈이다.

◆특수기록물 관리기관 견제 시스템 없다=특수기관 기록물 관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들 기관의 기록을 관리하고 점검할 수 있는 기관이 없다는 점이다. 현행 기록물관리법에는 ‘국정원을 비롯한 특수기관의 설립과 운영 자체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별도 규정이 없다. 따라서 국정원이나 헌법재판소, 중앙선관위 등 특수기록물 관리기관은 사실상 ‘치외법권’ 지역으로 남게 됐다.

국정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헌재나 법원 등 다른 특수기관들은 기록을 자체 관리하지만, 정보공개청구 등을 통해 관리 상태가 일반에 공개된다. 하지만 국정원은 기관 성격상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다. 세계일보 취재팀은 행정정보공개청구와 설문 자료 등을 통해 국정원의 기록 관리와 보존 실태 등을 확인하려 했으나 서고의 크기를 알려주는 것조차 거절했다.

문서 폐기와 관련, 외부 인사의 참여가 불가능한 것도 국정원 기록관리의 맹점으로 지적된다. 현재 국정원은 감찰실장의 책임 하에 국정원장 등 수뇌부와의 조율을 거쳐 문서 공개와 폐기를 결정하고 있다. 이 같은 기록관리는 내부에서 문서가 무단 폐기되거나 방치되더라도 이를 견제할 적절한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99년 제정된 기록물관리법에 따라 기록관리 전담부서를 두고 기록물을 관리하고 있다”면서 “다만 국정원법에 따라 내부 직제나 설치 장비 등에 대해서는 외부 공개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염규홍 조사1과장은 “이제 국정원도 일정 기간이 지났거나 국가 안위 등과 관련이 없는 문건의 공개에 대한 원칙을 세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규정 준수하는 특수자료관 한 곳도 없다=특수자료관 설치 기관 가운데 한 곳도 자료관을 규정에 맞게 설치한 곳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행 법은 통일부, 외교통상부, 국방부, 검찰청, 경찰청 등 5개 기관을 특수자료관 설치 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 기관은 영구문서일 경우 30년 동안 자체 보존하고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토록 하고 있다. 일반 행정기관이 9년 동안 자체 보존하고 이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들 기관도 기록과 관련, 상당한 특혜를 누리는 셈이다.

더욱이 국가기록원이 제시한 법 규정에 적합한 자료관을 설치한 기관은 거의 없다. 다만 외교통상부만이 예산을 확보하고 국가기록원과의 협의를 거쳐 자료관 서고를 신축 중이다. 법원이나 검찰, 통일부 등 다른 기관은 내부 논의 중이지만 국가기록원에 협의를 요청하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중앙선관위의 경우 예산 확보가 힘들어 사실상 서고 신축을 포기한 상태다.


<6-2>국정원, 정보 공개 '고무줄 잣대'

원칙없이 유리할땐 "가능” 불리할땐 "불가”

국가정보원의 정보와 기록 공개 원칙은 다분히 자의적이다.
지난달 모 방송사가 KAL 858기 피격사건 의혹을 다루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한다고 하자, 국정원은 강당에 당시 수사 자료를 쌓아 놓고는 취재팀을 불러들여 내용을 공개했다.

방송사 관계자는 “작년 여름부터 국정원측에 취재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방송이 나가기 직전에 (자료공개가) 성사됐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수사와 관련해 불리한 방송이 나갈 것을 우려해 막판 공개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다시 말해 국정원은 기관의 이익에 따라 임의로 자료를 공개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입을 열지 않는다는 의미다.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간첩 혐의로 조사받다 숨진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 사건이 단적인 예다. 2002년 5월, 사건 당시 중정 수사관들이 간부들에게 최 교수를 간첩으로 허위 보고한 다음 자살로 위장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뒤 2년이 다되도록 국정원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지난 3월 17일 “중정 발표가 조작된 것이었다”는 당시 수사관의 법정 증언이 나오는 등 수세에 몰리자, 다음날 보도자료를 통해 “유가족을 비롯해 국민 여러분께 죄송스럽고 유감스럽다”며 사과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이종찬 당시 국정원장은 “국민들에게 유용한 정보라면 공개하겠다”며 그동안 닫혀 있던 국정원의 각종 정보를 국가기관과 기업, 국민들에게 공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내부 논란도 있었지만 ‘국민에게 다가간다’는 코드를 내세웠다. 국민들도 “세상 참 많이 변했네”라며 국정원의 변신을 기대했다. 그러나 불과 10년도 안 된 지금에 와서는 “공식적으로 외부에 공개할 수 있는 정보는 없다”며 다시 원칙론으로 회귀했다.

<6-3>해외에선 정보기관 기록 독점 "NO”

美 CIA·英 MI 5 문서 독립기관서 통합관리

해외에서는 정보기관들이 기록 독점의 ‘특혜’를 누리는 사례가 드물다.
미국에서는 중앙정보국(CIA)의 기록을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통합 관리하고 있다. CIA가 우리나라 국가정보원과는 달리 일반 기록물관리법 대상 기관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CIA는 비밀문서를 작성하더라도 보존 기간과 비공개 시한을 정한 뒤 이관 절차에 따라 늦어도 50년까지는 NARA에 자료를 넘겨야 한다.

NARA에서 CIA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체제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CIA측은 또 비밀자료라 할지라도 25년이 지난 후에는 반드시 NARA 기록물 전문가와의 협의를 거쳐 공개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 국가기록원 이상민 전문위원은 “CIA의 자료도 별도의 조치가 없으면 25년이 지나 자동적으로 공개된다”며 “다만 CIA는 불가피한 경우 NARA측과 협의해 비공개 시한을 연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비밀 일괄해제 장치’도 주목할 만하다.

명지대 김익한 교수는 “CIA가 비공개 연장 권한이 있지만,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대통령이 일괄적으로 비밀를 풀 수 있는 제도도 마련돼 있다”고 말했다. NARA 비밀해제실 직원이 50명가량에 불과해 관련 업무를 제때 처리하지 못할 것을 고려한 조치다.

또 NARA는 CIA와 연방수사국(FBI)에 대해 언제든지 기록물 관리 실태를 조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도 갖고 있다. 조사 내용은 국회에 보고되며, 위법사실 적발 때에는 검찰 고발도 가능하다.

영국 등 나머지 선진국에서도 정보기관들의 기록이 투명하게 관리되고 있다. 예컨대 007영화의 산실인 영국 ‘MI5(국내안보국)’는 지난해 해체된 뒤 관련 비밀자료들이 국립기록보존서로 이관돼 공개 절차를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