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1-17 18:51
[문화산책] ‘헌책방’이 아니라 ‘고서점’이다
[문화산책] ‘헌책방’이 아니라 ‘고서점’이다

‘성하지 않고 낡은 책’ 인식은 잘못
우리 스스로 지식문화 귀하게 여겨야


도호쿠 대지진 이후의 방사능 공포에도 6개월에 한 번은 꼭 일본을 찾는 이유는 친구도 온천도 아니고 고서점(古書店) 때문이다. 도쿄 진보초에 며칠을 파묻혀서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에 흠뻑 빠지는 시간이야말로 더할 수 없는 지복(至福)의 순간이다.

중국 베이징의 류리창(琉璃廠) 거리도 황홀하다. 중궈서점(中國書店)과 룽바오자이(榮寶齋), 원우(文物)상점에 들러 오래된 전적의 향기를 맡다가, 룽바오자이에서 옛 그림을 구경하고 화선지를 산다. 류리창은 언제나 국내외의 학자, 예술가, 간서치(看書痴)들로 북적거린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웃 중국·일본의 문화를 폄하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자국 전통문물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보면 오히려 우리가 두 나라에 한참 못 미친다. 한류라는 이름의 가무연희(歌舞演戱)가 조금 인기를 끈다고 해서 마치 우리 문화가 상당히 앞선 걸로 생각하는 건 큰 착각이다.

우선 고서(古書)를 헌책이라 부르고, 고서점을 헌책방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우리가 우리 고유의 문명 유산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잘 알 수 있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헌’이란 말은 ‘오래돼 성하지 않고 낡은’이란 뜻의 관형사다. 고서를 ‘오래돼 성하지 않고 낡은 책’이라고 부르는 문화 풍토는 선대가 이룬 문명을 성하지 않고 낡은 것으로 보는 반문명적이고 반지성적인 생각의 틀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고가(古家)를 헌집이라고 하고 조선 백자를 헌 항아리라 부르는 것과 다름없다. 베이징의 류리창, 도쿄의 진보초와 함께 동아시아 문화의 3대 보물창고였던 인사동은 국적 불명의 관광지로 변질해버렸다. 고서점 미술관은 급격히 줄어들고, 조야한 기념품이 진열된 상점과 전통음식점을 가장한 관광식당들로 가득 찬 ‘사이비 이태원’이 돼버렸다. 일본은 도쿄에만 300곳, 진보초 한 동네에만 150군데가 넘는 고서점이 있다. 그런데 한국의 고서점은 전국에 50여곳뿐이라 한다. 그나마 대부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노포(老?)들의 폐업이 줄을 잇고, 창업주의 2세 3세들은 가업 계승을 기피한다. 어렵고, 힘들고,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헌책방 체인점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겠지만, 그건 신간 서점에도 있는 책을 파는 중고도서 유통점일 뿐이다.

화봉문고 여승구 대표는 한국 고서점이 몰락한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한 바 있다. 첫째, 국민이 책을 안 읽는 풍토 때문이다. 둘째, 후진적인 고서 유통 질서다. 셋째, 전문적 식견과 경륜을 갖춘 고서점 주인이 적다는 것이다. 고서적상은 서지학자 못지않은 안목을 갖춰야 하고, 그 방면의 학자를 능가할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돈 안 되는 일에 인생을 바칠 젊은이가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고서점 문화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은 독자에게 있다. 언제부턴가 고서의 새로운 독자가 탄생하지 않는다. 한문 교육이 중지된 탓이다. 대학교수조차 한문 전공자가 아니면 옛 문헌을 원전으로 읽지 못한다. 더 기막힌 일은 대부분 대학의 교수 연구업적 평가에서 한글로 쓴 논문 점수를 영어논문 점수의 반도 안 쳐준다는 사실이다. 이런 평가기준을 한국사건 국학이건 아랑곳없이 들이대고 있다. 이런 판국에 누가 고서를 읽겠는가.

대학이 이렇게 된 것은 국내 모 신문사가 대학평가를 한답시고 만든 기괴한 잣대 때문이다.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대학당국이 더 문제다. 한글과 우리 옛글인 한문으로 쓴 논문은 학문적 업적에 관계없이 모조리 폄하하는 이상한 학술 평가가 이 나라 국학을 고사시키고 있다. 스스로 제 발목에 쇠고랑을 채우는 노예근성의 발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웃 일본만 해도 책을 ‘혼’(本)이라 쓴다. 책이 근본이란 뜻이다. 중국은 국력 신장에 따른 전통문화의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고서적 유통망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우리만 동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의 지식문화를 귀중히 여기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귀하게 보겠는가. 우리는 예부터 활자문화 선진국이다. 동아시아 시대를 앞장서서 이끌기 위해서는 잘못된 제도를 뜯어내야 하지만, 사람의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우선 ‘헌책방’이란 말부터 ‘고서점’으로 고치자.

김무곤 동국대 교수·커뮤니케이션학

세계일보 2015-01-17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1/16/20150116003237.html?OutUrl=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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