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3-20 08:58
[세상만사-김남중] 책 추천 좀 부탁합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002146&code=11171399… [415]
그건 좀 감동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가 절판된 책 한 권을 살려낸 이야기 말이다. 게이츠는 지난해 여름 40여년 전에 출간된 경영서 한 권을 소개하는 글을 신문에 썼다. 지금까지 자신이 읽어온 경영서 가운데 여전히 그 책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는 저작권을 보유한 저자의 손자를 찾아내 재출간 허락을 받아냈다. 그렇게 해서 ‘경영의 모험’이란 책은 지난해 가을 미국에서 재출간됐고, 최근 한국 독자들의 손에까지 쥐어졌다.

세계 최고 부자에다 엄청난 돈을 자선사업에 쓰는 게이츠라면 책 한 권을 되살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책 한 권 재출간하는 일쯤은 예컨대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하는 일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하게 보일 수 있다. 게이츠가 책 하나를 재출간하기 위해 보여준 행동은 그가 진심으로 책의 힘을 신뢰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려준다.

이번 주 나온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어렵고 두꺼운 책 맨 뒤에서 김영란 전 대법관의 추천사를 발견했을 때도 비슷한 감동이 일었다. 총리 후보로 매번 거론될 정도로 명망을 가진 인사가 국내에서 이름조차 생소한 미국 로스쿨 교수의 책을 알리기 위해 흔쾌히 길고 정성스러운 글을 써주었다. 김 전 대법관의 추천이나 격려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 책을 펼쳐볼 용기를 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올 초 김 전 대법관은 한 강연회에서 ‘시적 정의’를 자신의 판사 생활에서 중요했던 책으로 소개하고, 그 책의 저자인 마사 너스바움에 매료돼 있다고 말했다. 너스바움의 책 ‘혐오와 수치심’ 출간을 준비 중이던 출판사가 이 소식을 알고 김 전 대법관에게 추천사를 부탁했을 때, 이렇게 공들여 쓴 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게이츠나 김 전 대법관처럼 신망과 인기,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책을 얘기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진심을 다해서 해볼 만한 일이고, 해야 할 일이다. 좋은 책 한 권을 알리고, 키우고, 지키고, 살리는 것은 좋은 책 한 권을 만드는 일에 비해 덜 중요하지 않다.

요즘 출판계에서는 ‘책의 발견성’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이들이 많다. 사람들이 책을 ‘발견’할 기회가 너무 적어진 것이 지금의 책 안 읽는 시대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동네서점의 몰락, 책 소개 기사와 프로그램의 감소, 책 광고의 위축, 모바일 중심 문화 등이 책의 발견성을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거론된다. 여기에 맞서 책의 발견성을 확장시키기 위한 대안으로 출판계가 새로 주목하고 있는 게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팟캐스트, 북카페 등이다.

책의 발견성과 함께 ‘책의 화제성’, 즉 ‘이야깃거리로써의 책’도 약화되고 있다. 사람들의 대화나 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책은 점점 더 화제에서 멀어지고 있다. 유명인사들의 추천은 책의 발견성과 화제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책을 추천하는 것은 중요한 문화적 실천이 될 수 있다.

물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책 추천사를 쓰고 있다. 책이 중요하고 출판사와 동네서점을 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많다. 다들 의미가 있다. 다만 책을 말하고 추천하는 방식을 바꿔볼 필요는 있다. 게이츠나 김 전 대법관이 그랬던 것처럼 한 권의 책, 한 명의 작가에 집중해서 깊게 소개하는 방식이 필요해 보인다. ‘이효리가 요즘 읽는 책’ ‘손석희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김훈의 책상 위에 늘 있는 세 권의 책 중 하나’ 이런 추천사들을 기대한다.

-국민일보 2015.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