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6-15 09:54
품격있게 늙어가는 법, 나무에서 배웁니다-20만평 수목원 가꾸는 조상호 나남출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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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책 만들며 벤 나무들 미안한 마음에 묘목 심어
내년 5월엔 책박물관 개장

'책바치' 외길을 걸어온 국내 대표 출판인 조상호 나남출판 회장(66)은 8년 전부터 경기도 포천 소요산 자락에 20만평 규모 수목원을 가꾸고 있다. 사람들은 성공한 출판인이 고상한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겠거니 했는데, 이번엔 그의 나무심기 철학을 책으로 펴냈다. 수필집 '나무심는 마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상에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것은 나무밖에 없다. 나무처럼 아름답게 늙고 싶다면 당연히 나무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나남출판 사옥에서 만난 그에게 나무처럼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다.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제자리를 지키면서 삶의 시련과 풍파를 불평 없이 묵묵히 이겨내는 거지. 그걸 내면의 나이테로 만들어가는 거요. 휘어지고 구부러진 못난 나무라도 끝까지 살아남아 선산을 지키는 한 가지 미덕을 발휘하지 않소. 사람도 자연의 일부임을 잊지 않고 저마다 본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해해 줘요. '나와 남이 어울려 사는 우리'라는 나남의 이름에도 나무처럼 살자는 철학이 담겨 있지요.'

수목원을 조성하게 된 동기는 뭘까. '1995년 책 창고를 세우기 위해 은행 대출을 받으면서 부실 채권인 파주 적성면 임야 1만5000평을 떠안게 됐지요. 그냥 두기도 뭐하고 36년 출판업을 하면서 책 2800여 종을 펴내는 동안 종이를 만들기 위해 베인 나무들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어요. 그래서 느티나무와 메타세쿼이아 묘목을 옮겨 심기 시작했지요.'

출판사 이름을 딴 나남수목원이 영글어가던 2011년 시련이 찾아왔다. '서울 우면산 산사태가 나던 해였지요. 수목원 안에 자리 잡은 송전선 철탑 축대가 무너져 내렸어요. 골짜기 1㎞가 초토화되면서 출판사 직원들과 함께 애지중지 키워 온 나무 3000그루가 토사에 떠내려 갔어요. 내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렸어요. 한동안 실의에 빠졌다가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아예 수목원 안 작은 봉우리를 허물어 미니댐을 만들었어요. 그 덕분에 산중호수가 형성되고 그 옆에 책박물관을 지을 구상도 하게 됐지요.'

내년 5월 개장할 책박물관에는 명사들 서재를 옮겨오고 작가들이 머물며 책을 쓸 집필공간도 만들겠다고 했다.
조 회장은 그 꿈을 위해 주말마다 수목원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 농부처럼 살고 있다.

그는 나무를 심으면서도 삶의 지혜를 터득한다고 했다. '촘촘히 심어 놓은 어린 나무를 어느 정도 자란 뒤에 옮겨 심으려고 뽑아보면 잔뿌리 중간에 지렁이가 우글우글해요. 지렁이는 나무의 은인이에요. 공기나 수분이 잘 통하도록 해주고 배설물이 흙을 기름지게 해주니까요. 세상 일도 그렇지요. 나 혼자 잘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도움이 작용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주변을 돌아보게 돼요.'

박경리의 '토지'로 대박을 터뜨린 후 커뮤니케이션 북스라는 이름으로 언론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출판에서 일가를 이룬 그가 예의 '나무 철학'을 통해 출판계에도 의미 있는 조언을 던졌다. '돈이 되지 않는 학술서 출판에 승부를 걸었던 것은 출판에도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겨 외면하지만 나중엔 거목으로 자라게 되는 가죽나무와 참죽나무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우직하게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 나무처럼 사는 길이겠지요.'

- 2015.06.15 매일경제, 글·사진 = 이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