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6-24 11:26
'장서의 괴로움'과 明窓淨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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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장유승 서평위원/단국대 동양학연구원·한문학

일본의 서평 칼럼니스트 오카자키 다케시(岡崎武志)의『장서의 괴로움』(정수윤 옮김, 정은문고, 2014)은 장서가의 고충을 유쾌한 필치로 담아낸 책이다. 책에 둘러싸여 사는 행복을 추구하는 장서가는 그만한 代價를 치러야 한다. 책을 꽂을 자리가 없어 이곳저곳에 쌓아놓다 보면 방 안은 금세 책으로 가득 찬다. 방 하나를 차지하던 책은 오래지 않아 집안을 모두 점령한다. 가족들의 눈총은 말할 것도 없고, 목조주택이 많은 일본에서는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집이 기울거나 무너지는 일도 종종 생기는 모양이다.

이사하는 것도 고역이다. 이삿짐 센터가 제일 싫어하는 물건이 책이다. 책 때문에 이사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긴 넓은 집으로 이사해도 소용없는 짓이다. 도로를 넓히면 교통량이 늘어나는 것처럼, 주거공간이 넓어지면 책도 따라서 늘어난다. 어쩌다 큰맘 먹고 읽지 않는 책을 대거 처분해도 서재 풍경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오히려 책을 처분하고 허전한 마음에 또 책을 사들고 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책 때문에 심각한 불편을 겪으면서도 책 욕심을 억제하지 못하는 장서가들의 이야기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격한 공감을 자아낸다.

직업상 많은 책을 필요로 하는 연구자로서‘장서의 괴로움’은 남의 일이 아니다. 장서의 세계에도 뉴턴의 운동 법칙이 적용되는 것인지, 관성의 법칙에 따라 한번 싹튼 책 욕심은 그칠 줄 모르고, 가속도의 법칙에 따라 책이 늘어나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진다. 학생 시절에는 일일이 구입해 볼 수밖에 없지만, 연구 경력이 쌓이고 교류의 폭이 넓어지면서 증정받는 책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스로 만들어낸 책까지 가세하면서 장서량의 증가 속도는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린다. 읽지 못하는 책이 쌓이는 모습을 보면 처음에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 책을 읽는 행위와 책을 소장하는 행위를 별개로 인식한다. 어쩌다 손에 든 책조차 학생 시절만큼 열심히 읽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책은 제돈 주고 사서 읽어야 제맛인가 싶기도 하다.

다행히 장서의 세계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도 적용된다. 이미 가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같은 책을 새로 구입하거나, 가지고 있는 책이 분명한데 책더미에 파묻혀 찾지 못한 나머지 부득이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지경에 이르면 제아무리 책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장서가라도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 다 읽은 책을 즉시 처분하는 방식으로 장서량을 일정량으로 제한하는가하면, 1인 헌책시장을 열어 대량 처분의 기회로 삼기도 한다. ‘自炊’라는 해결책도 있다. 책을 낱장으로 해체하고 스캔해 전자책으로 만드는 이른바‘북스캔’이다. 스스로 가공한다는 의미에서 자취라고 하는 모양이다. 우리 대학가에서는 학생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교재를 공유하는 방법으로 활용해 저작권 논란이 있지만, 정년을 앞둔 교수 중 일부는 이런 방식으로 장서를 처분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장서의 괴로움』의 저자는 햇빛 잘 드는 창가의 깨끗한 책상 위에 단 몇 권의 책만 올려놓는‘明窓淨机’를 이상적인 서재로 언급한다. 기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상하리만큼 책이 적은 사람도 있기는 하다. 어디 다른 곳에 책을 잔뜩 쌓아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장은 텅텅 비어 있고 책상 위에는 컴퓨터와 책 몇 권이 전부다. 흡사 이사를 마치지 못한 신임 교수 연구실의 풍경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손닿는 곳에 가급적 많은 자료를 쌓아놓아야 안심이 되는 연구자에게 명창정궤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장서에 대한 애착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 책의 저자에게도 명창정궤는 실현 불가능한 꿈이다. 그러나 그칠 줄 모르는 책 욕심을 어떻게든 정당화하려는 다른 장서가들과 달리, 저자는 책을 필요 이상으로 끊임없이 쌓아 두는 행위를 비틀어진 욕망으로 단정한다. 책이 너무 많아지면 지적 생산의 유통이 정체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책을 모을 줄 모르는 사람이 연구자가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책을 버릴 줄 모르는 사람 역시 연구자로서는 실격이라고 본다. 불필요한 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논문과 저술에서도 같은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 욕구가 결핍의 충족을 넘어 과도한 욕망으로 변하는 순간을 주의해야 한다.


- 교수신문 2014.10.20 장유승 서평위원/단국대 동양학연구원·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