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9-11 11:53
“헌책은 국경 넘어 세계인이 공유할 수 있는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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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영국 책마을 헤이온와이 창시자 리처드 부스

2000명 남짓한 주민들이 사는 영국의 소박한 시골 마을 ‘헤이온와이’(Hay-on-Wye)를 세계적인 책마을로 만든 리처드 부스(77)가 한국을 찾았다.
 11일 시작되는 경기 군포시의 ‘2015 군포독서대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2011년에 이어 두번째 한국 방문인 그는 몸이 불편해 보였지만
 “한국에, 그리고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등 세계 곳곳에 헌책방 마을들이 생겨나고, 동서양이 책의 네트워크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세계책마을협회의 명예종신회장이며 관광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영국의 버킹엄 궁전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한 그는
고향인 헤이온와이에서 17살까지 성장한 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귀향해 이 마을에서 50여년째 살고 있다.

1961년 옥스퍼드대 마치고 시골 귀향
옛 소방서 건물에 첫 헌책방 열어
“마을 사람들에 책정리 일자리 제공”
‘킹앤헤이 독립왕국 서적왕’ 취임
88년부터 ‘헤이축제’로 세계적 명성
12일 군포독서대전서 초청 강연

잉글랜드와 웨일스 접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헤이온와이는 1960년대 리처드 부스가 주도해 수십개의 헌책방이 들어서면서 세계적인 책마을(book town)로 자리잡았다.
1988년 이 마을에서 시작돼 매년 열리는 ‘헤이 페스티벌’ 기간에는 세계에서 작가와 전문가들은 물론 관광객 수만명이 찾아와 각종 강연과 전시, 공연, 낭독회 등 헌책들의 향연을 즐긴다.
처음부터 헤이온와이가 성공적인 책마을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1961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온 리처드 부스는 “당시 고향 마을은 역경에 처해 있었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양을 키우고 농업에 생계를 의존하던 영세 농업인이었다.
기계가 발전하면서 농사일을 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교육받은 청년들은 고임금과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마을의 전통을 지켜온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인근 도시들의 대형 슈퍼마켓에 밀려 생존이 불확실했다. 리처드 부스는 “어릴 적 가난했던 나는 아버지가 사다 준 헌책들을 읽으면서 컸다.
대학 졸업 뒤 생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고향을 보면서 나는 비어가는 마을의 가게들을 책으로 채워야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가격이 낮은 예전 소방서 건물을 사들여 첫번째 책방 보즈북스를 열었다. 당시 경영난을 겪던 많은 대형 도서관들이 몇세기 동안 수집한 책들을 판매하자 이 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헌책 구매는 영국을 벗어나 미국에서도 이뤄졌다. 3, 4세대 이전의 이민자들이 미국 이민 당시 품에 안고 들어간 모국어로 된 다양한 소중한 책들도 수집했다.

그는 “미국은 물론 영국 전역에서 컨테이너에 실려 매년 수만권의 책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모든 책들을 정리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나는 고향 마을에 많은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1977년 4월1일 만우절에는 마을에 폐허처럼 남아 있던 ‘헤이 캐슬’을 구입한 뒤 헌책과 희귀도서 수백만권을 이 성에 비치하며 ‘킹 앤 헤이 독립왕국’을 선언하고 스스로 ‘서적왕 리처드’로 취임했다.
그는 “책방들을 열어 가면서 (마을과 헌책방들에 대한) 홍보가 필요했다. 독립왕국을 선포한 뒤 광고 효과를 많이 보았다”고 했다.

책마을에 대한 호기심을 품은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마을 주민들은 관광객에게 아침식사와 숙소를 제공하는 일에 나섰다.
20여개의 호텔과 게스트하우스, 농가 민박시설은 물론 레스토랑과 카페가 들어섰다.
리처드 부스는 “헤이가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인 농업 및 관련 직업의 침체에서 벗어나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말했다.

고향을 살려낸 헌책은 리처드 부스에게 무엇일까? 그에게 물었다.
 “저자가 권장하는 새책은 국가경제이고, 독자가 권장하는 헌책은 국제경제다”라고 그는 말했다.
 “새책은 국가 안에서 판매하는 것이지만 헌책은 국가를 넘어 세계인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새책이 주로 국내 유통과 소통을 전제로 한다면, 헌책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이를 위해 나라의 경계를 넘어 국제적으로 유통되면서 세계경제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책이 국가경제를 성장시킨다면 헌책은 세계를 성장시키고 국가를 넘어 사람들을 소통과 이해의 길로 이끈다는 것이다.

21세기 들어 주문형 출판(POD)과 전자책 출현 등 책의 새로운 생태적 변화에 아날로그적 책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리처드 부스는 “정보의 디지털화는 자연재해(정전)에 취약하다고 한다. 그리고 주문형 출판이나 전자책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이 인터넷에 게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에도) 책은 생존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세계 책마을 강연은 자신의 생일이기도 한 12일 오후 4시30분 군포 중앙공원 책 평생관에서 열린다.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 한겨례 2015.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