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9-21 16:44
제2의 ‘헤이온와이’ 꿈꾸며…양곡창고가 책 박물관으로 ‘삼례 책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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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광주 영천중 학생들이 스크랩북(다이어리)을 만드는 체험에 참가하기 위해 방문해 김진섭 책공방북아트센터 대표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책공방북아트센터 제공


잉글랜드와 웨일스 접경에 있는 영국의 시골마을 헤이온와이(Hay-on-Wye)는 세계적인 책마을이다. 이곳은 60년대까지 주민들이 양을 키우고 농사를 짓던 한적한 마을이었다.
젊은이들이 고임금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면서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 줄고 마을이 쇠락하기 시작했다.

도시·산업화로 쇠락한 삼례
영국의 ‘헤이온와이’ 꿈꾸며
2013년 책박물관 등 3곳 둥지
‘책마을’로 마을 재생 시도

 공방서 책 만들고, 박물관 강연도
내년엔 창고 3동 추가로 개조
“젊은이들 고향서 미래 꿈꾸고
책으로 주민들 행복해졌으면”

이 마을을 살린 것은 다른 지역이 하듯 기업·투자 유치가 아니다. 헌책이었다. 수십개의 헌책방은 동네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1988년부터 매년 5월 말에 열리는 ‘헤이 페스티벌’ 기간에는 세계 곳곳에서 작가와 관광객 등 수만명이 찾아와 각종 강연과 전시, 공연, 낭독회 등을 즐긴다.
사람들이 몰리면서 동네에는 20여개의 호텔과 게스트하우스, 농가 민박시설, 레스토랑과 카페가 들어섰다.
영국 헤이온와이처럼 국내에도 책을 지역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곳이 있다. 인구 1만5천명의 소도시 전북 완주군 삼례읍이다. 이곳은 ‘삼례는 책이다’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삼례읍 문화예술촌에는 책박물관과 책공방북아트센터, 김상림목공소가 있다.
삼례책마을은 책박물관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를 한국학문헌아카이브(보관소), 서점, 헌책방, 화랑, 북카페, 문화예술인 작업실 등 책 관련 시설로 꾸며 사람과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곳을 목표로 한다.

삼례는 조선시대 호남 최대 역참지였을 만큼 교통요충지였지만 도시화·산업화로 쇠락했다.
박성일 완주군수는 “사람이 떠나는 농촌마을에 도시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책을 소재로 문화상품을 개발해 주민들이 행복한 마을로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삼례 책마을은 2013년 6월 첫 단추가 끼워졌다.
박대헌(62) 책박물관 관장이 뜻을 같이하는 후배인 책공방북아트센터 김진섭(49) 대표, 목공소 김상림(54) 대표와 함께 책마을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박대헌 관장은 1999년 강원도 영월에서 폐교를 빌려 문을 열었던 책박물관을 이곳으로 옮겼다.
그는 최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운영하던 고서점 호산방을 여기로 이전했다. 책마을 만들기에 집중하려는 생각이다.

책마을은 책박물관을 시작으로 주변 창고 3개 동에다 새 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책박물관에서 약 150m 떨어진 삼례성당 건너편이다.
이곳 창고는 1950~60년대 지어진 양곡창고로 지난해까지 비료창고 등으로 사용됐다. 내년 봄에 완공될 예정이다.
박대헌 관장은 “책마을 조성이라는 큰 그림을 잡고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완주군과 제가 서로 파트너로 필요했던 것 같다”며
 “삼례 책마을이 언젠가는 완주군민을 먹여 살릴 거라는 생각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책박물관은 문을 열자마자 고서대학을 열었다. 두 시간씩 한 달에 한 번 무료강좌를 열었다. 고서란 무엇이고, 가치·평가를 어떻게 내리며,
 수집·연구 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강좌를 진행했다. 여기서 고서란 단순히 오래된 책이 아니라, 고서가 지닌 고급문화를 말한다.
첫 회부터 빠지지 않고 참석한 왕미녀(53)씨는 “강좌를 들으며 고서의 매력에 빠졌고 자료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책박물관은 이례적으로 주인 없는 서점도 운영한다. 깨끗한 헌책을 구입하면서 요금함에 양심에 따라 돈을 넣는다. 기획전시도 다섯 차례 열었다.
 ‘전라도길 황토길: 시인 한하운을 기리며’ ‘한국전쟁 보도사진 100선: 굳세어라 금순아’ ‘전라도 여자’ 등이다. 곧 ‘동행: 필사본과 종이’를 내용으로 기획전을 연다.
손으로 쓴 책(필사)과 옛날 종이를 주제로 한다. 한지, 중국 종이, 서양 종이를 비교 전시한다.
김상림목공소는 조선 목수들의 삶과 철학이 스며 있는 목가구를 재현하는 곳이다. 연장과 목가구를 통해 조상의 미감과 철학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목수교실을 통해 인력을 양성하고 목공예도 체험할 수 있다.
책공방북아트센터에서는 자신만의 책을 직접 만든다. 목표가 ‘만들고, 기록하고, 생각하고, 꿈꿔라’다.
2001년 공방을 만든 김진섭 대표는 “지금 책은 천편일률적인 붕어빵이다. 대량생산이 99.9%다. 유럽은 소량이면서 핸드메이드가 10%나 된다.
책마을 조성의 꿈을 이루려고 서울에서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주민들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마을 주민들을 직접 만났다.
 “먹고살기 바쁘고 우리는 책과 상관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읍사무소를 찾아가 주민들이 참여할 방안을 제안했다.
그런 노력으로 주민들을 대상으로 전액 무료인 ‘책공방 자서전학교’를 올해 3월부터 8주간 시작했다.
창고 업무를 담당했던 최동식(82)씨는 “내가 관리했던 창고에 책공방이 들어섰고 자서전을 만든 게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경남 진주에서 책공방을 방문한 60대 박수영씨는 “자서전을 만들어준 게 참 좋아 보였다. 나도 이 과정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와 올 방학 때 어린이와 어른을 대상으로 책 만들기 워크숍을 열었다. 200여명이 참여해 반응이 좋았다.
삼례초등학교 5학년 박지윤양은 체험을 하고 나서 “공방에서 소가죽 수첩을 만들었는데 특별한 경험이었다. 여러 옛날 기계를 봐서 기분이 좋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와서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메모를 남겼다.
이곳에는 책을 묶어주는 사철기, 책을 자르는 재단기, 책을 누르는 압착기, 활자를 한 개씩 납물로 뽑아내는 활자주조기, 철심을 이용해 종이를 묶어주는 호침기 등의 기계가 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 스크랩북, 다이어리, 사진첩, 판화가 들어간 나만의 티셔츠 만들기 등이 있다.
김진섭 대표는 “책을 만드는 대안학교를 세우고 싶다. 감성이 풍부한 아이들을 가르치면 나중에 책 만드는 전문가나 장인이 될 수도 있다.
완주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먹고살기 위해서 서울로 빠져나가지 말고, 고향에서 특화된 문화를 창출해 멋진 삶을 살게 하고 싶다. 이게 책마을을 꿈꾸는 이유”라고 말했다.


일제 양곡수탈 창고예술 중심지로 변신
복합문화공간인 전북 완주군 삼례읍 문화예술촌은 원래 일제강점기 양곡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양곡창고였다. 양곡창고는 삼례읍 후정리 삼례역 근처에 있었다.
일제가 전북 곡창지대에서 수탈한 쌀을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보관했다.
문화예술촌은 2013년 6월 문을 열었다. 개관 때 창고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당시 쌀을 보관하던 시설이 남아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1만1825㎡ 터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창고 5개 동과 1970~80년대 건축한 창고 등 모두 7개 동이 남아 있다.
이 창고를 이용해 책박물관, 책공방북아트센터, 김상림목공소, 문화카페, 디자인뮤지엄, 비주얼미디어아트미술관 등이 들어섰다.
삼례 문화예술촌은 완주군한테서 위탁받은 ‘삼삼예예미미협동조합’이 운영하고 있다. 삼삼예예미미는 삼례미술관을 줄여 반복되는 어감을 통해 재미있게 표현한 이름이다.
도시재생의 새로운 모델 개발, 문화예술 중심지로 자리매김, 함께하는 소통의 장 마련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태호 예술촌장은 “문화는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고, 마을문화는 지역사회를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의 아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등 완주군의 역사자원을 활용해서 희망찬 지역사회를 만드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완주/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