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5-18 14:12
만화·자동차에 '덕질', 재능 보이는데 성적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5/17/2016051701591.htm… [279]

사진(위) 김진겸 비타민 상상력 대표는 공룡덕후다. 다섯살때부터 공룡에 빠진 그는 공룡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3D콘텐츠제작회사를 창업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사진(아래) 야구 덕후 김정화씨는 프로야구팀 NC다이노스 변호사로 입사해 덕업일치를 이뤘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Story] 덕후라도 걱정, 아니라도 걱정

특정 주제에 몰입해 창의성 발휘하는 21세기형 인재
정작 학교선 재능 살리기 쉽지 않아 부모들도 “답답”

#1. 서울 목동에 사는 중1 김서인(13·가명)군은 입학한 지 두 달 만에 어머니 강현정(44·회사원)씨에게 "학교에 가기 싫다"고 말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냥, 안 가도 될 것 같아서"란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나 싶어 담임에게 면담을 신청한 강씨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업시간은 물론이고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도 만화만 그리느라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른 과목 선생님들께도 주의를 받고요. 계속 이러면 앞으로 학교생활 힘들 것 같습니다." 아들을 혼내고 달래기를 반복하다 결국 미술학원에 보냈다. 그마저도 한 달 만에 그만뒀다. "혼자 그리는 게 좋다"고 했다. 강씨는 "학교나 학원에서는 아이의 재능을 살려줄 수 없다는 게 고민"이라고 했다.

#2. 주부 정민아(46)씨 둘째 아들 김지용(15)군은 자동차(車) 덕후다. 모형 자동차를 수백 대 모았고, 자동차 부품이나 외관을 정교하게 스케치하거나 정비 서적을 사다 본다. 지용군의 학교 성적은 중하위권. 정씨는 "나중에 자동차를 잘 만들려면 수학이나 과학을 잘해야 한다"고 했지만, 듣는 둥 마는 둥이다. 정씨는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해서 대학을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특별 전형이라도 내신성적이 바탕이 돼야 진학이 가능하다. 애가 뒤늦게라도 철들기만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덕후가 곧 능력자인 시대다. 21세기, IT가 사회 변화의 중심이 되면서 너드와 오타쿠가 스타 대접을 받는다. 지난 3월 서울에서 열린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나 록 콘서트를 보듯 열광했다. 어린 시절부터 바둑에만 매진한 이세돌과 구글을 창업한 세르게이 브린, 10대에 이미 컴퓨터 게임을 개발한 '알파고의 아버지' 데미스 허사비스가 함께 카메라 세례를 받는 모습은 이 시대 너드와 오타쿠들의 위치를 잘 보여준다. 이정동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개방적 혁신 시대에는 이들의 능력과 혁신 아이디어를 모두 가져와서 이용해야 한다. '제너럴리스트'만 모여서는 창의나 융합이 전혀 안 된다"고 말했다.

덕후는 한 가지 영역, 주제에 깊이 빠진 사람을 의미한다. 대개 학업 성적이 낮거나 대인 관계가 좋지 않지만,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재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덕후 자녀를 둔 부모들은 "답답하다"고 입을 모은다. 덕후가 미래의 인재라지만, 한국 교육 현장에선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덕후인 아이들 관심사가 교육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문 탓이다. "알파고 개발자이자 게임 덕후인 허사비스가 만약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게임중독자로 살았을 것"이란 농담이 나오는 이유다.

김소아 한국교육개발원 부연구위원은 "미국의 경우 사회성이 부족하고 공부를 못해도 특정 분야의 지식이 탁월한 아이들에게 영재 교육을 시킨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학업성취도가 뛰어나면서 교사가 추천하는 아이들만 이런 기회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덕후들이 사회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도 문제다. 좋아하는 것에만 몰입하니 타인과의 교류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감정 표현에 서툴다. 이향숙 한국아동청소년심리상담센터 소장은 "인간관계에 자신이 없으니 집에서 은둔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더 집착한다"고 했다.

제도권 교육으로 해결할 수 없는 덕후의 자질을 개발하고 교육하는 것은 아직까지 부모의 몫이다. 김소아 부연구위원은 "과학 덕후인 아이를 위해 교사인 엄마가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의 탐구력과 창의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공부 뒷바라지하는 경우를 봤다"고 했다. 조진표 와이즈멘토 대표는 "덕후 아이들이 잘 안 풀리는 이유는 무엇 하나에 푹 빠졌을 때, 그게 공부가 아니면 못하게 하는 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못하게 하니까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져버린다. '너는 이쪽 분야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격려해줘야 한다. '다 잘하라'고 하지 말고 잘하는 부분을 더 살려주려는 노력이 지금 시대에선 필요하다"고 했다.

덕후가 도전할 만한 입시 전형은 국내에 드물다. 이만기 유웨이 이사는 "학생부 종합전형이라는 게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을 갈 수 있다고 소문이 났지만 상당수 대학에서 학생부 교과 성적을 동시에 보기 때문에 한 가지만 잘해서 갈 수 있는 전형 자체가 많지 않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비교과활동'으로 연결시켜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풀어내거나(조진표 와이즈멘토 대표) 특기자 전형을 활용해야(이남렬 한국진학정책연구소 소장) 한다고 조언했다.



덕후: 일본말 ‘오타쿠’에서 파생된 단어로, 한가지 분야에 몰입하는 사람

덕질: 좋아하는 일을 파고드는 행위

덕심: 관심 분야를 좋아하는 마음

덕업일치: 관심 분야로 직업을 삼았을 때


- 조선일보. 2016.5.18. 변희원, 최주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