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7-15 13:07
“민족학 기초작업 56년 펼쳐왔죠”

(사진 위) 지식산업사가 출판한 겸재 정선의 명품첩에 대해 김경희 대표가 설명하고 있다. 1970년대 펴낸 화집 도판의 색과 질감이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사진 아래)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지식산업사 사옥에서 만난 김경희 대표. 그는 “출판사가 죽고 서점이 죽는데도 다들 입 다물고 있다”며 열변을 토했다.


[인터뷰]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 한국의 장수 출판사들 1

출판·독서계가 어려움에 처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랜 세월 꾸준히 좋은 책들을 만들어온 출판사들이 적지 않다. 갈수록 어려움이 깊어지는 시대 흐름 속에서 그런 출판사들의 경험과 전략은 업계와 독자들에게 좋은 공유자산일 수 있다. 창사 40년이 넘은 출판사의 대표들을 만나 그들의 역사와 생각을 들어보고 이를 격주로 연재한다.


70~80년대 역사·문학·한국학 출판
출판계 ‘산증인’으로 지금도 현역활동

“우리말로 우리 생각 펼치는 세상 꿈꿔”
책·출판 전문 라디오방송 개설 제안


“출판계가 왜 어려우냐고? 전자책, 디지털화 등 시대 변화 탓도 있지만 이명박 정권 이후 진행된 종이책 출판 환경 악화, 그중에서도 교육방송(EBS)의 학습 참고서 독점이 결정적 원인의 하나라 생각한다.” “이런 얘기 하는 게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지만, 금성출판사의 이른바 ‘좌익’ 역사교과서 파동이 났을 때도 출판계가 나서서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모두 입 닫고 당국 처분에 맡겼다. 당사자들도 떠들면 세무사찰 당할 거라며, 제발 입 다물고 있어달라 부탁했다는 얘길 들었다.”

‘출판 노장’ 김경희(78) 지식산업사 대표를 만났다. 출판이력 56년째, “80줄이 다 돼 출판사 현역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으로는 내가 유일할 것”이라는 그가 약 1천종의 책을 내며 46년째 이끌어온 지식산업사. 1970~80년대 ‘잘나가던 시절’엔 역사·문학에 한국학까지 “민족학 분야 학술 서적 출간 ‘3관왕’을 차지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여기에 1971년에 전무로 지식산업사에 들어간 그가 한국 출판사상 처음 시도한 대형 컬러판 한국미술 화집 출판도 지식산업사 자부심 목록의 앞자리에 들어간다.

“당시 달력조차 컬러판이 없어 외국 대기업들 달력을 들여와 쓰던 시절에 한국미술 컬러 화집을 처음 시도했다. 신문지 크기의 대판에 조선시대 회화 35점을 넣고 한글과 영어·일본어 해설을 넣었다.” 24년째 편집작업을 해온 경복궁 옆 통의동 옛 창의궁 터 150평 대지를 꽉 채운 2층짜리 낡은 슬래브집 사무실에서 그가 직접 펼쳐 보여주는 그때의 도판들은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원화의 색과 질감이 거의 그대로 살아 있었다.

무광택 아트지를 처음 사용해 순 국내 기술로 총 4권까지 찍어낸 <이조회화>의 권당 가격은 애초 3만4600원. 당시 3만원 정도였던 서울대 교수 한 달 봉급보다 더 많았단다. 이 비싼 책을 처음 사준 고객은 필립 하비브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다. 북과 접촉하고 있던 이후락 당시 남북조절위원장도 북에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사 갔다. 일본에도 10만달러어치가 팔려 ‘이색 수출품’으로 일간지에 기사까지 났다. 그 뒤 <겸재 명품첩> <추사 명품첩> <한국 근대회화> 등으로 이어진 컬러화집들은 지식산업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성공작이었다.

그의 사촌형으로, 시인이자 중앙 일간지 두 곳의 신춘문예(문학평론) 당선자였던 김우정씨가 1969년 을지로의 조그마한 방에서 시작한 지식산업사에 김 대표가 들어간 것은 그 2년 뒤. 앞서 4·19혁명 당시 서울 문리대 4년생이었던 그는 다음해 박정희의 5·16쿠데타 뒤 출판 쪽으로 진로를 정하고 민중서관 국사대사전팀에서 4년간 일한 뒤 을유문화사에 스카우트됐다가 다시 지식산업사로 옮겼다.

출세작이기도 했던 화집 성공을 토대로 그는 한국사, 한국문학, 한국학, 한국철학(사상) 쪽으로 출판 영역을 넓혀갔다. 한국사 연구회가 연간 학술지 <한국사 연구>를 낼 때부터 이를 지원했던 김 대표는 한국 학술 기획출판의 효시로 주목받은 단행본 <한국사 연구 입문> 비용도 감당했다. “필자로 참여한 50여명의 학자들에게 미리 원고료를 지불(선고료)했다. 전례없는 일이었다. 그 책 나오자 국문학자 김용직·조동일·황패강 교수 등이 왜 국사학자들만 봐주냐며 항의했다. 나야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잘됐다 싶었지.” 그렇게 해서 <한국문학 연구 입문>이 나왔다. 두 책이 나오자 이번에는 국학자 이우성·이가원·정창렬·윤사순·임형택 등이 완성 상태의 원고를 들고 지식산업사를 찾아왔고, <한국학 연구 입문>으로 묶였다. ‘민족사 3관왕’이란 말이 거기서 나왔다.

“1980년 ‘광주사태’ 때 화집 판매의 핵심지역이던 광주·전주 조직이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 아웅산 테러와 칼(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 났을 때는 3~5개월짜리 할부 판매금이 들어오지 않았고 어음들은 펑크가 났다.” 부도가 났지만, 학계 인사들과 박경리 등 작가들 400여명이 재건후원회를 꾸린 덕에 회사는 살아났다. 살벌했던 전두환 정권의 ‘5공’ 시절 얘기다.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이 등록취소돼 폐간당한 것도 그 시절. 그 대응 차원에서 출판계, 학계 인사들과 만든 모임이 ‘수요회’였다. 그 전통은 출판인회의로 이어진다.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말로 우리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세상”을 꿈꾸어온 김 대표는 “민족학의 기초가 되는 작업들”을 평생 고집해왔다. “70여년 살아오면서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통일 민족국가 수립에 실패하게 만든 원인들, 그 뿌리가 뭔지 줄곧 생각해왔다.”

출판계를 살리는 아이디어로, 그는 프랑스처럼 책과 출판 얘기를 전문으로 하는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런 방송이 생기면 그것을 중심으로 세종의 집현전이 일궈냈던 것처럼 인재와 인력 풀, 시스템이 만들어질 것이다. 온갖 종교방송이 다 있고 국악, 교통방송까지 있는데 왜 안 돼? 라디오방송은 돈도 많이 들지 않는다.” 이와 함께 ‘세계언어문자기록 박물관’ 건립도 제안했다. 예전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였던 경복궁 옆 송현동의 한진재벌 소유 공터 부지에 한국문화 대표급 건축물을 지으면 좋겠다는 것. 거기에 ‘책의 전당’을 짓자는 제안도 나왔으나 문화부 쪽이 오히려 마뜩잖아하는 눈치다.

직원 7명(편집자 4명)으로 어려운 시절을 “그런대로 버텨나가고” 있지만, 근년에 출간 종수가 많이 준데다, 책 표지 디자인 등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지적도 받는다. 김 대표는 “내 역량이 부족한 탓”이라며 고쳐나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외화내빈 풍조로 흘러선 안 된다”고 했다. 형식보다 내용을 고집하는 꼬장꼬장한 기질은 20여년 해 왔다는 국선도 수련 때문일까. 한마디로 깐깐하다.



- 한겨례신문. 한승동 선임기자. 2016.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