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12-24 14:05
[토요기획]“시위 학생도 책도둑도 품던 곳…계단 위로 차곡차곡 쌓이던 문화의 향기 다시 한번”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223213000… [359]

(사진1) 종로서적 1990년 입사동기인 안순자씨와 이영주씨, 20년 근속 경력의 신영옥씨(왼쪽부터)가 지난 22일 새 종로서적을 찾았다. 이들은 새 종로서적의 성공을 기원했다.
(사진2) 2002년 부도로 문을 닫은 옛 종로서적.
(사진3) 5·18 관련 서적을 따로 진열하기도 했다.
(사진4) 1991년 대입 원서를 사기 위해 몰려든 인파.
(사진5) 되살아난 파란색 도장.



ㆍ14년 만에 다시 문 연 종로서적…옛 직원들이 말하는 ‘종로 터줏대감’ 부활의 의미


2002년 6월4일, 한국은 한·일월드컵 폴란드전에서 2 대 0으로 승리했다. 48년 만에 거둔 월드컵 본선 승리에 전국이 들썩였다. 이날 ‘95년 전통의 종로서적 부도’라는 한 줄 자막이 뉴스 화면을 가로질렀다. 1907년 한국 첫 기독교서점으로 출발해 창립 100주년을 불과 5년 앞두고 쓰러진 종로서적은 그 존재감에 비해 언론의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하지만 출판인들에게는 충격이고 슬픔이었다. 이후 출판계에선 종로서적을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왔다. 23일 마침내 종로서적이 폐업 후 14년 만에 서울 종로타워 지하 옛 반디앤루니스 자리에 다시 문을 열었다.


새 종로서적은 옛 주인이 다시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영풍문고 임원 출신의 서분도 대표가 경영을 맡았다. 경향신문은 옛 종로서적 사람들을 수소문해 지난 22일 만났다. 현재 북스리브로에서 사업본부 이사로 일하는 신영옥씨(54), 정수기 유통전문업체 한미산업을 운영하는 이영주씨(50), 신대방동 ‘골드북’ 서점에서 근무하다가 업계를 떠난 안순자씨(44)다. 왜 출판인들은 “종로서적, 종로서적” 했을까? 신씨는 “종로서적은 출판인 인재양성소였다”고 말했다.


■ 지금도 영향력 큰 종로서적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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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는 1981년 5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종로서적에 입사해 문을 닫을 때까지 21년을 일했다. 공무원 오빠가 추천한 직장이었다. 신세계백화점 판매사원인 친구보다 4만원이나 적은 초봉이지만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자부심이 그만큼 컸다. 당시 매장 직원들은 주문, 진열, 판매를 비롯해 독자 상담까지 도맡았다. 요즘 말로 치면 북마스터 역할이다. 매일같이 들어오는 신간을 읽지 못하면 목차라도 외워두었단다. 게다가 출판사가 아니라 자신들이 베스트셀러를 만든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이규형의 소설 <청춘스케치>가 그런 경우다. 이규형은 나중에 자신의 소설을 각색해 강수연과 박중훈이 주연으로 나오는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들었다.


“신생 출판사였는데 재밌어서 문학코너 열세 군데에나 깔았어요. 그게 대박이 난 거죠.” 이후 출판사는 빌딩을 세웠다고 한다.


1990년 입사한 안순자씨는 “(내용이) 별로인 책은 좋은 자리에 깔아달라고 부탁해도 안 깔아줬다”고 했다. 책을 ‘까는’ 것은 사장도 침범할 수 없는 고참 직원의 고유 권한이었다. 출판사 직원들은 서점 실세인 직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밴드스타킹까지 들고 왔다고 한다.


[토요기획]“시위 학생도 책도둑도 품던 곳…계단 위로 차곡차곡 쌓이던 문화의 향기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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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가 몇 번째 선반에 무슨 책이 꽂혀 있는지 머리에 다 있었어요. 코너당 하루에 많으면 30종이 들어왔는데, 새로 온 책은 자기만 알아두려고 다른 직원 모르게 숨겨두기도 했어요(웃음). 전날 새로 들어온 책이 궁금해서 휴일 다음날은 새벽같이 출근하곤 했고요. 그때는 그런 욕심, 근성이 있었어요.”


종로서적 직원들은 지금도 서점가에서 영향력이 있다. 현재 대형서점 점장 중 종로서적 출신이 5명에 이른다 한다.


■ 지울 수 없는 종로의 랜드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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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서적은 이미 1980년대에 쾌적한 독서를 위해 층마다 의자를 깔아두는 후덕한 서점이었다. 직원도 450명이나 됐다. 크리스마스와 12월31일에는 한복 차림으로 손님을 맞았다. 올림머리를 하는 300여명의 여직원 때문에 미용실은 북새통을 이뤘다. “종로에서 만나자” 하면 으레 종로서적 앞으로 모였다. 인파로 인해 철제 셔터가 찌그러져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 않았다. 신씨는 “불편은커녕 당연히 그런 줄로 알았다”고 했다. 1987년 민주화운동 당시 시위가 한창일 때도 셔터를 내리지 않았다. 직원들은 방독면을 쓰거나 촛불을 켜며 최루가스를 견뎠다. 종로서적으로 숨어드는 학생들의 뒤는 건장한 사내 축구동호회 직원들이 봐주었다.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는 말이 통하던 때여서 웬만하면 경찰을 부르지도 않았다. 물론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과 휴가 일정까지 수첩에 적어가며 책을 훔쳐 팔아온 책도둑은 예외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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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서적이 부도가 날 위기에 처하자 직원들은 백방으로 뛰었다. 안씨의 입사동기로 언론노조 최초의 서점 지부였던 종로서적 노조위원장을 3연임했던 이영주씨는 “비수기로 통하는 6월에도 하루 매출 2500만원을 올렸던 종로서적이 고작 몇 천만원에 부도가 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고 했다. 한때 1000명이 넘는 회원이 있던 온라인 카페 ‘종로서적 사람들’은 사실상 종로서적살리기운동본부였다. “종로서적 덕분에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키웠다”는 출판사 대표들까지 속속 지불유예를 약속했다. 억대의 월세도 조정의 여지는 있었다. “세팅을 다 해놨는데 (사장이) 경영권 승계를 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말하는 이씨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동기들과 종로에서 만날 때마다 옛 종로서적 자리 다이소에 들르곤 했다는 안씨와 달리 신씨는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려서” 빨리 지나치곤 했다고 한다. 세 사람이 가장 그리워하는 장소는 동관과 서관 사이 계단의 오목하게 파인 흔적이다. 서점의 화강암 계단이 닳아서 파일 정도로 많은 이들이 오갔다.


■ 새 사장도 종로서적 부활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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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분도 종로서적 대표는 “종로서적의 부활을 꿈꾸던 출판인의 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때마침 종로타워의 새 소유주가 종로 문화 복원에 관심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의기투합해 지난 9월부터 일사천리로 개점을 추진했다고 한다. 서 대표는 “종로서적에서 일했던 분들을 모시고 싶었는데, 어린 분들은 제가 모르고 윗분들은 연세가 많아서 무산됐다”며 “그 시절 종로서적이 만들어온 문화를 이어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새 종로서적의 전화번호는 739-2331이다. 옛 종로서적 번호의 뒷자리를 그대로 따왔다. 종로서적에서 책을 사면 싸주던 포장지 속 김홍도의 서당도는 이제 종이쇼핑백에 인쇄된다. 동그라미 속에 책 모양이 그려진 파란색 도장은 옛 종로서적의 그것 그대로 쓴다. 강래풍 종로서적 점장은 “실질적인 주 독자층인 여성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고 했다. 주제별로 책을 분류한 테마존, 46석의 긴 테이블과 1인용 부스, 따뜻한 느낌을 주는 조명으로 장식됐다. 옛 종로서적과는 달리 북카페를 연상시켰다. 팬시점 아트박스와 공차, 카페마레, 주시브로스 등 식음료 매장이 지하 2층의 절반을 차지한다.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라는 양대 서점과의 차별화가 얼마나 통할까. 신씨는 “기본은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날 신씨는 “지금은 직원들이 일일이 책을 싸주기 어려우니 독자용 셀프 포장대를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는 경영진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전 종로서적 출판부 편집장이라는 중년 남성은 마침 서점 개점 소식을 듣고 지나던 길에 들렀다고 했다.


이들에게 종로서적은 다 읽지 못한 책과 같다. 언제고 다시 펼쳐 곱게 읽어 내려가야 할 것 같은.



-경향신문. 장희정 기자. 2016.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