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2-14 11:41
친근한 문화 놀이터, 신나는 예술 아지트로
   http://news.joins.com/article/21244818 [55]
동네 책방이 돌아왔다. 그런데 문제집 파는 학교 앞 서점과는 다른 모양새다. 주택가 깊숙이, 건물 꼭대기 층에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다.



술도 팔고 연애 상담도 하는 요즘 동네 책방

지난해 10월 서울 창전동에 문 연 ‘사적인 서점’은 오래된 건물 4층에 있다. 1층 계단실 입구에 세워놓은 작은 입간판만이 서점의 존재를 알린다. 4층에 올라서도 서점 안을 볼 수 없다. 일반 사무실 같은 철제문 탓이다. 머뭇거리는 방문객이 손잡이를 돌릴 수 있게 독려하는 것은 문에 붙은 작은 쪽지글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세요.’ 1대 1 책 처방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서점 안은 환한 베이지 톤이고 , 허브 향이 났다.

2000년대 말, 홍대를 중심으로 생겨난 독립출판물 서점이 요즘 유행하는 동네 책방의 1세대로 꼽힌다. 개성 있는 내용과 모습의 독립출판물을 볼 수 있다는 매력 덕에 입소문이 나다가 장르집중형 동네 서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행ㆍ시집ㆍ추리소설ㆍ문학ㆍ음악 등 대형 서점의 서가 한 코너를 더 깊게, 집중 공략한 서점들이다. 시인이 운영하는 시집 전문 책방처럼 책방 주인이 관련 장르에 관해 전문가급인 곳도 많다. 순위 위주의 베스트셀러 말고 진짜 좋아하는 책을 추천받기 좋다.

요즘 모세혈관처럼 퍼지고 있는 동네 서점 에 가면 볼거리, 놀 거리가 많다. 술도 팔고, 연애 상담도 하며, 콘서트도 연다. 『여행자의 동네 서점 』의 저자 구선아씨는 “접근하기 쉽고 친근한 문화 놀이터처럼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복합문화공간의 대안으로 동네 서점이 뜨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중앙SUNDAY S매거진이 서울에서 뜨고 있는 동네 서점 30곳을 추려보았다. 향기파는 책방, 연애 상담하는 책방 주인장을 만나서는 지금 동네 책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책과 어울리는 향기 만들다
- 양평동 책방 ‘프레센트.14’ 최승진 대표

지난해 3월 문을 열자마자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문제집 파나요?” 사람들은 서울 한강미디어고등학교, 당산초등학교 옆 주상복합아파트 1층에 자리 잡은 서점에서 당연히 문제집을 팔 줄 알았다.

그런데 ‘프레센트.14’에는 문제집이 없다. 26㎡(약 8평) 남짓한 작은 책방에는 1000여권의 책과 은은한 향기로가득 차 있다. “바(Bar) 느낌으로 꾸몄다”는 책방에 들어서면 긴 테이블에 일렬로 놓인 디퓨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어린 왕자’ ‘그리스인 조르바’ ‘냉정과 열정 사이’…. 시향할 수 있게 놓인 7가지 향의 이름표가 어디서 많이 본 책 제목이다. 책방 주인인 최승진(29) 대표가 직접 만들었다.

“한 가지 향을 만드는데 보통 15~20개 원료를 섞어요. 조향(調香)용어로 음악 용어를 많이 쓰는데, 화음을 뜻하는 ‘어코드(accord)’가 가장 중요해요. 잘 어울리는 향이 있고 섞으면 안 되는 향이 있거든요. 향 컨셉트를 정하면 어코드 안에서 조향하죠.”

동네 서점에서 조향사를 만났다. 최 대표는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향기 마케팅 회사에 다니다 서점 주인이 됐다. 한 대형서점에서 책의 향기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책과 향기의 궁합에 눈을 떴다.

평소 책 선물을 좋아하는데 담긴 의미와 상관없이 선물 자체만으로 다소 소박하다는 느낌을 늘 받았어요. 책과 어울리는 향을 처음부터 개발해 책과 함께 선물할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그렇게 ‘향기 파는 책방’을 차리게 됐습니다.”

‘어린 왕자’향의 경우 기념일이 많은 5월을 겨냥해 만들었다. ‘순수함’을 표현하기 위해 과일과 꽃의 향을 조합했다. 성년의 날 선물로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이라는 귀띔이다. 이렇게 만든 디퓨저와 책을 묶어 선물 패키지를 만들었다. 향과 책은 고를 수 있다. 매장뿐 아니라 서점의 온라인 홈페이지에서도 판다. 다른 동네 서점에도 위탁 판매 중이다.

대다수의 동네 서점은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중심가가 아닌 곳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신만의 무기를 갖춘 곳이 많다. 혼술 트렌드에 맞춰 ‘책맥’을 할 수 있거나, 책과 함께 하룻밤 묶는 스테이를 운영하기도 한다. 온라인을 통한 유통ㆍ홍보는 기본이다.

‘프레센트.14’의 책꽂이에는 책을 종이 포장지로 꽁꽁 싼 ‘블라인드 북’이 십수권 놓여 있다. 책 제목은 볼 수 없지만 포장지 겉에 몇 가지 키워드가 적혀 있다. 이를 테면 이렇다. ‘#29금 소설’ ‘#벗어나지 않고 버틸 수 없는 청춘’ ‘#고유의 빛을 잃은 그대’…. 바로 소설가 이외수의 『꿈꾸는 식물』의 ‘블라인드 북’ 버전이다.

“대형 서점에 가면 신간이나 베스트셀러 위주로 매대를 꾸려 놨잖아요. 옛날 책은 잘 안 팔리죠. 다 똑같은 책만 읽으니 책도 재미없고 결국 서점도 재미없는 곳이 됐어요. 나온 지 오래됐지만 좋은 책을 골라 ‘블라인드 북’으로 팔고 있는데, 다행히 반응이 좋아요.”

서점 주인이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돈을 못 번다는 우려에서다. 최 대표는 “1년간 운영한 결과 처음보다 형편은 나아졌지만 아직 흑자는 아니다”고 말했다. 동네 서점들이 잘 정착해 동네를 오가다 책을 사고, 책을 읽으며 여유를 찾을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버텨보자는 결심이다.

그는 동네 책방의 미래를 일본 도쿄의 츠타야 서점에서 본다. 독서ㆍ문화ㆍ카페ㆍ쇼핑 등 라이프스타일에 관련된 모든 것을 결합한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다.

“책에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듯,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사거나 알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동네 서점이 점점 발전할 것 같아요. 책 판매만으로 서점을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다양한 시도가 곁들여지면서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는 것도 흥미로워요. 동네 서점에서 다채로운 문화까지 경험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의 질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연애 고민 책으로 풀어드려요
- 연남동 책방 ‘드로잉북 리스본’ 정현주 작가

역시나 간판은 없다. 연남동 코오롱 아파트 상가 3층, 피아노 교습소를 포함해 여러 사무실이 서점의 이웃이다. 서점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305A호 문 앞에 놓인 안내 글귀뿐이다. ‘책 파는, 드로잉 북 리스본- 당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책을 권해드립니다.’

철제문을 열자 커다란 테이블 두 개가 먼저 보인다. 안쪽 깊숙이 놓인 테이블에 서점 주인인 정현주(46) 작가가 문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 이 서점의 단골 고객이라면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

주인장과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오른편 책장에 꽂힌 책들을 구경한다. 책마다 작가가 직접 연필로 쓴 추천글 띠지를 천천히 읽어본다. 김연수 작가의 『우리가 보낸 순간』을 빼드니 파란 띠지에는 ‘사랑하기와 글쓰기에 관하여. 59페이지를 읽어보세요’라는 손글씨가 적혀 있다. 문쪽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다가 어느 정도 공간에 적응이 됐다고 생각하면 작가에게 말을 건넨다. “저기,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지난해 2월에 문 연 이 서점은 작가의 작업실이자, 또한 연애상담소다. 작가는 사랑 이야기꾼으로 유명하다. 2013년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된 『그래도, 사랑』에 이어 『다시, 사랑』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등을 썼고, 라디오 작가로 일했다.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모아볼까 해서 서점 문을 열었어요. 작업실의 반을 서점으로 오픈한 셈이죠. 문 여는 토요일마다 사람들이 많이 와서 울고 가요. 30대 싱글 여성들이 많아요. 저는 주로 질문만 합니다. 사랑은 결국 자기 문제잖아요.”

처음 서점 문을 열었을 땐 출판사마다 일일이 전화해 책을 들여놨다. 지금은 출판 도매상인 북센을 통해 한두권 구입하고 있다. 책을 진열했다 팔리지 않으면 다시 수거해가는 소위 위탁판매는 하지 않는다. 공간도 작고, 위탁판매 과정에서 책이 상하는 것도 작가로서 보고 싶지 않아서다. 독립출판물의 경우 저자가 직접 서점으로 연락해 책을 갖고 온다. 동네 서점의 유통망은 손에서 손으로 이어진다.

“사랑이나 심리학 쪽 책을 주로 갖다 놓아요. 제가 읽고 좋았던 책들만 골라놨어요. 베스트셀러보다 주인장 취향에 따라 큐레이션(Curation)한 책을 볼 수 있다게 동네 책방의 장점 아닐까요. 굳이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을 읽으며 시간낭비할 것 없이 잘 아는 사람이 추천해 주는 책을 집중해서 읽을 수 있죠.”

그렇다고 ‘드로잉북 리스본’에 달달한 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화책도 있고, 인문학 서적도 있다. 호주에 있는 원시부족의 텔레파시를 다룬 책 『무탄트 메시지』를 상대방의 마음 읽기에 애닳아하는 사람에게 권하기도 한다. 사랑은 결국 모든 책에 있다는 게 주인장의 생각이다.

“내 사랑 문제에 관해 50명에게 물으면 다 답이 달라요. 사랑이 자기 문제라고 말한 이유에요. 현명한 사람과 이야기해서 해결하고 싶은데 멘토를 찾기가 참 힘들죠. 그럴 때 책이야말로 좋은 멘토가 되어줍니다.”

최근 동네 서점이 많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만큼 문 닫는 곳도 많다. 책만 팔아서 서점을 유지하는 일은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장의 대다수는 투잡족이다. 정 작가는 “책 디자인 회사가 사무실 한쪽에서 운영하는 여행 책방, 공연기획사가 운영하는 음악 전문 서점 등 현재까지 동네 서점의 운영 비결은 따로 하는 일에서 돈을 벌고 있다는 데 있다”고 전했다.

‘드로잉북 리스본’은 ‘리스본에서 보내는 편지’를 다달이 발행하고 있다. 정기구독자 150여명이 매달 우표가 붙은 파란 편지봉투를 기다린다. 작가와 친구들이 함께 쓰고 그린 내용이 안에 담겼다. 어떤 날은 연남동 지도가, 또 어떤 은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앨범 소개가 담겼다. 정 작가는 연남동 서점 주인들과 함께 동네 서점 투어도 기획하고 있다. 조만간 다양한 재주꾼들이 운영하는 각양각색의 서점을 테마에 따라 재밌게 돌아볼 참이다.



- 중앙선데이 S매거진. 글 한은화 기자,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2017.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