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1-01 09:23
[문화산책] 책처방ㆍ희귀본ㆍ팝업북… 시인이 연 동네책방엔 특별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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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시인의 ‘책방이듬’
조용히 사색하고 글 쓰는 공간, 동네 주민들의 ‘책 처방사’ 자처
성미정 부부의 ‘마이 페이버릿’
초판 1쇄본ㆍ오리지널 장난감 고집, 디자이너ㆍ고서적 수집가들이 단골
김태형 시인의 ‘청색종이’
1950년대 초판본ㆍ절판 시집 등 희귀본 즐비한 시집 전문 서점

바야흐로 동네책방의 시대다. 대형서점과 인터넷서점에 밀려 급감했던 동네책방 수가 최근 1~2년 사이 늘고 있다.

계간 ‘동네서점’을 발행하는 애플리케이션 개발업체 퍼니플랜의 전국 동네서점 현황 조사에 따르면, 2015년 9월1일부터 올해 7월31일까지 문을 연 동네서점은 모두 277곳, 이중 올해 개점한 동네서점이 31곳이다. 일주일에 1개씩 동네책방이 생긴 셈이다. 동네책방이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의 공세에 맞서 살아남는 길은 당연하게도 차별화.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대표는 20일 출간된 출판전문지 ‘기획회의’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유동하는 세계에 맞추어 판매대도 함께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장 대표는 “이제 독자들은 서점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서점이 주는 경험에 매력을 느낀다. 서점은 경험을 최적화하는 공간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독자의 기호와 필요에 맞춰 ‘좋은 책’을 선별해 제시하는 큐레이션이 동네책방의 나아갈 길이라는 요지다.

김태형 성미정 김이듬 시인이 차례로 동네책방을 열었다. 중고책 시장에서 40만원대에 거래되는 김수영 전집 1쇄부터 1930~40년대 팝업북까지 희귀본을 구비한 시인들의 남다른 큐레이션 감각을 구경할 수 있다. 문인 낭독회,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희귀본 전시회도 종종 열린다.

책 처방 해주는 ‘책방이듬’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호수공원 앞 ‘책방이듬’은 문단에서 가장 ‘핫’한 서점이다. 김이듬(48) 시인이 자신의 이름을 따 문을 연 이 곳은 시인이 모아온 희귀본들과 새로 주문한 책 2,000여권이 꽂혀있다.

25일 개업식을 가진 김이듬 시인은 “조용하게 사색하고 글 쓸 수 있는, 커피 주문하고 5,6시간 앉아있어도 눈치 안 주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12평 남짓한 공간에 꽂힌 시, 소설, 철학, 에세이의 공통점은 다분히 책방 주인의 취향이라는 점. 중고시장에서 30~40만원대에서 거래되는 김수영 전집, 최승호의 시집 ‘눈사람’, 박서원의 시집 ‘난간 위의 고양이’ 등의 1쇄가 신간 시집과 사이 좋게 꽂혀있다. 책방을 둘러본 김민정 시인이 “부르는 게 값인 책들”이라고 눈이 커질 정도로 귀한 책들이다.

김이듬 시인은 이곳에서 ‘책 처방사’를 자처한다. 그는 “습작 시절 저만 해도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가 늘 절실한 물음이었다”며 “요즘 기분은 어떤지, 관심사가 뭔지 세심히 물어서 누군가에게 ‘책 여행의 동반자’로 곁을 내주고 싶다”고 말했다. 동네주민에게는 일산 호수공원을 모티프로 한 여러 편의 시가 실린, 이문숙의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까지’를, 시 습작생에게는 김혜순의 시론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를 추천했다. 동네주민의 의견을 반영해 글쓰기, 책읽기 모임도 만들 계획이다.

31일부터 고양ㆍ파주에 사는 작가들이 이끄는 ‘일파만파 낭독회’가 열흘에 한번 꼴로 열린다. 다과를 포함해 참가비는 단돈 1만원. 파주에 사는 김민정 시인이 첫 주자로 나선다.

출판 편집자들의 성지 ‘마이 페이버릿’
1994년 ‘현대시학’, ‘현대시사상’으로 각각 등단한 성미정ㆍ배용태 부부가 운영하는 ‘마이 페이버릿’은 광고계 종사자, 출판사 편집자, 연예인 등 ‘유행 만드는 게 직업’인 사람들에게 성지 같은 서점이다. 2005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문을 열었다가 올해 7월 종로구 청운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취급 품목은 해외 그림책, 디자인 서적과 큐브릭(영화나 만화 캐릭터를 소재로 만든 장난감), 베어브릭(수집용 장난감) 등 성인용 장난감이다.

이 곳의 차별화 전략은 주인장의 안목과 발품. 그림과 책, 도자기 등 빈티지 제품을 사 모은 수십 년 노하우를 십분 활용해 책을 사간 손님들이 되팔 때도 거래가가 높을 진품만 골라낸다. 23일 만난 배용태 시인은 “서적은 1쇄, 장난감은 오리지널 제품들만 고집한다”고 말했다. 민간 박물관을 차려도 좋을 물건들이 즐비해 한때 이 가게에서 팔았던 희귀본들이 광고마다 등장하고, 책 디자인을 모방한 시각 이미지들이 넘쳐났다. 요즘도 주 단골은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장난감·고서적 수집가들이다.

시인 부부는 소장한 책만으로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세계 팝업북의 변천사를 소개한 ‘나는 팝업북에 탐닉한다’(갤리온〮2008)를 내기도 했다. ‘덕후 기질’을 다시 한번 살려 이르면 올해 말 두 번째 공동 에세이집 ‘걸어본다-장난감&빈티지’(가제)를 낼 예정이다.

가게를 청운동으로 이전한 후, 한 달에 한번 꼴로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달에는 체코의 팝업북 디자이너 쿠바스타의 대표작을 모은 ‘쿠바스타의 작품 세계’ 전시회를 연다. 1960년대 동화 작가 샤를 페로의 작품을 팝업북으로 만든 페어리 테일 시리즈, 높이 30㎝에 이르는 정교한 대형본 팝업북 파나스코픽 모델 시리즈 등을 만지며 감상할 수 있다.

한국문학 희귀본은 여기에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2가에 자리잡은 ‘청색종이’는 동명의 출판사가 운영하는 서점이다. 서점 주인은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한 김태형 시인. 지난해 2월 문래예술창작촌 근처에 문을 열었다가 올해 5월 지금 자리로 이전했다. 26일 만난 김씨는 “출판사 낼 자리를 알아보려고 문래동을 돌아다니다 공간을 보고, 서점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서점이 구비한 4,000여권 중 8할이 시인이 소장했던 중고책, 이중 상당수가 시집이다. 시집 전문 중고서점인 셈인데 1950년대 출간된 초판본, 절판된 시집 등 중고책 시장에서 구하지 못할 희귀본이 즐비해 책 수집가, 문인들의 문의가 많다. 실비아 플라스 시집 ‘거상’(1990년 출간), 이용악 시집 ‘낡은 집’(1991년 출간) 등이 그런 이들에게 발견돼 팔려나갔다. 1951년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수록한 ‘상화와 고월’, 1980년 출간된 ‘시운동’ 동인지 등은 아직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김씨는 “10년 새 중고서적 값이 많이 올라 한 권에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 수집 욕심이 있다면 팔지 않을 책들”이라며 “저보다 이 책을 더 귀하게 여길 사람이 봐야 의미 있다고 생각해 팔게 됐는데 책방 임대료가 걱정될 때마다 수집가들이 연락해 수십권씩 사간다”고 웃었다.

문래동 일대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도 한다. 일주일에 나흘은 문학 강좌, 책 읽기 모임이 열리고, 독립출판물 제작 특강도 종종 선보인다.

(사진)김이듬 성미정 김태형 시인이 동네책방을 열었다. 희귀본부터 해외 디자인북까지 특화 장르는 다양하지만, 남다른 감각으로 모은 주인 애장품을 판다는 공통점이 있다.

- 한국일보 2017.11.01 이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