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5-14 09:24
남이섬 韓流 만든 이 남자, 탐라에 '헌책 공화국' 세우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11/2018051100018.htm… [50]

(사진) “책 분류 기준? 그냥 높이가 같은 것끼리 꽂았어요. 꼭 주제별로 나눠야 하나?” 강우현 대표는 발상이 남다르다. 서가 앞은 깨진 자기 그릇으로 장식했다. /성형주 기자


강우현의 '두 번째 실험'
황무지에 나무 심고 그림 새기는 등 재활용 예술로 제2의 남이섬 구현
25일부터 '제주 헌책 페어' 개최… 책 5권 가져오면 1년 무료 입장 "이 나라에선 헌책이 문화유산"

헌책 다섯 권을 건네자 회색 여권에 입국 도장을 쾅 찍어줬다. 이곳은 탐나라공화국. 제주공항에서 남쪽 내륙 중산간 지역으로 40분 달려 도착했다. 내비게이션 앱에 '한림읍 한창로 897'을 입력했다. '나라'를 세운 강우현(65) 대표는 "2015년 5월 9일 건국한 이후 지금까지 쇄국(鎖國) 중"이라 했다. 공식적으로는 '개국(開國)'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달 25일부터 6월 말까지 '반짝', 나라 문을 연다. 37일간이다. 이 기간 '제주 헌책 페어' 행사를 한다. 지금 전국의 헌책이 몰려드는 중이다. 현재 10만권이 모였다. 경기도 화성시 도서관에서 1만8600권, 한국은행에서 1만1000권을 보냈다. 한성대·숙명여대·영산대 등 여러 대학도 책을 보내왔다. 다음 주엔 충북대에서 6만권이 온다.

"디지털 공간에 밀려 매년 수천만권씩 책이 폐기되고 있어요. 소중한 우리 지식문화 자산이 폐지나 불쏘시개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버리면 '청소'지만 써버리면 '창조'. 탐나라공화국 '헌책 도서관'은 100년 후에도 남을 문화유산이 될 거예요."

지금은 양은 그릇만도 못한 취급을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 희귀본이 될 책들이라 했다. 공화국 내 '노자 서원'에 우선 1만2000권을 꽂았다. 30만~50만권 수장할 '헌책 도서관'도 조성 중이다. 지난 7일 찾았을 때 내부 공사가 한창이었다. 검은색 철제 책장을 설치하는 곳에 책 더미가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행사 때까지 완공은 어림없죠. 이렇게 만드는 과정 보여줘도 좋잖아요? 책 정리는 천천히 하면 돼요."

강 대표는 남이섬을 대표적 한류 관광지로 만든 주인공이다. 동화작가이자 그래픽디자이너인 그에게 2001년 섬 주인이 경영을 부탁했다. 월급은 100원만 받기로 했다. 대신 매출을 두 배로 올리면 이후 남는 수익은 멋대로 쓰겠다고 했다. 결과는 대성공. 시끄러운 유원지였던 섬을 예술 공간으로 바꾸자 여행객이 몰려들었다. 소주병을 녹여 타일 작품을 만들고 양변기로 화분을 만드는 '재활용 예술'로 섬을 가꿨다.

탐나라공화국은 '제2의 남이섬' 실험이다. 영토는 10만㎡(약 3만평). 당초 어느 사업자가 테마파크를 만들려고 허가받았다가 투자 유치에 실패해 방치한 땅이었다. 온통 돌밭에 가시넝쿨이 뒤덮여 있었다. 마침 중국인 부동산 투자 바람이 불었다. "중국에 파느니 우리 손으로 가꾸자"는 생각에 떠맡았다.

3년간 많은 일을 했다. 강우현식 '재활용 예술'이 곳곳에 가득하다. 돌밭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파낸 돌과 흙으로 산을 만들었다. 돌과 바위에 글자와 그림을 새겼다. 쓰다 버린 목재로 정자를 만들고 쉼터를 지었다. 버려진 철근으로 난간과 벤치를 만들었다. 황무지가 예술 공간으로 바뀌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찾아와 꽃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과정이 길[道]입니다. 불국사나 경복궁이 관광지 만들려고 지은 곳인가요? 살던 흔적이 관광지가 되는 거지요. 여행자가 만드는 여행지가 되어야 문화재가 되고 보물이 됩니다."

'헌책 페어'도 독자가 만드는 축제다. 이 기간에 입국하려면 조건이 있다. 책 5권을 가져와야 1년짜리 입국 비자를 내준다. 100권 이상이면 3년 비자를 받는다. 빈손으로 오면 '입국세' 3만원을 내야 한다. 헌 책을 파는 이벤트가 아니다. 책을 자유롭게 읽으며 상상력을 얻는 인문 공간이다. 미술 전시회, 인문학 강연, 공예 체험 같은 여러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지금 우리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로 가고 있어요. 인터넷으로 '통신'은 되지만 '소통'은 단절됩니다. 책에선 제목과 목차만 봐도 창조적인 지혜를 얻을 수 있어요."

그런데 공식 개국일은 언제일까. "지금도 앞문은 닫았지만 뒷문은 열려 있어요. 모르지 또…. '문을 열라'고 요구하는 병인양요 같은 일을 자꾸 겪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개항(開港)하게 될지도. 하하!"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2018.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