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7-27 14:40
“한국 인구만큼 많은 납 활자에 외국인들 깜짝 놀라죠”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55071.html#csidxd9afa50908e92… [3]

(사진1) 책과인쇄박물관 1층 전시실에서 전용태 관장이 진열되어 있는 납활자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다.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사진2) 활판 인쇄로 찍은 김유정 작품집 표지(위)와 김소월 시집 중 시 ‘진달래꽃’이 인쇄된 부분.
(사진3) 납 활자를 문선해 판을 뜬 모습.
(사진4) 전용태 관장이 박물관을 연 뒤 직접 만든 납 활자들. “한글 자모를 써서 이론적으로 1만개 이상의 활자를 만들 수 있다고 해요. 책을 만드는 데는 2200~2300개 정도가 필요하죠.”
(사진5) 전용태 관장이 활판 인쇄기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짬】 춘천 책과인쇄박물관 전용태 관장


“우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살아 움직이는 박물관입니다.”
2015년 개관한 책과인쇄박물관 전용태(66) 관장의 얘기다. 빈말이 아니다. 기자가 찾은 25일 오후 강원도 춘천시 김유정역 근처에 자리한 4층 건물의 박물관은 활기가 넘쳤다. 초등생 단체 관람객들은 활판 인쇄의 역사와 방법은 물론 직접 시연까지 하는 전 관장의 설명에 귀를 쫑긋 세웠다. 2층 교육실에선 박물관 직원이 새로 만든 납 활자를 조심스럽게 정리하고 있었다. 입장료 수입으로만 운영한다는 박물관에 직원이 다섯이나 됐다. 전 관장은 최근 김소월 시집 <못잊어>와 <진달래꽃>을 박물관에서 직접 만든 납 활자로 출판했다. 지난해 말 낸 김유정 단편집 <봄·봄 동백꽃>도 이렇게 냈다. “8월 초엔 윤동주 시집도 낼 겁니다. 김유정 소설 20편이 담긴 300쪽 분량의 작품집도 이미 문선·조판까지 마쳤어요. 연말까지는 내야죠.” 1970년대 후반부터 청타기나 전산사식 방식의 인쇄에 밀려 차츰 쇠퇴해버린 납 활자 인쇄를 되살린 것이다. 활판 인쇄를 하려면 먼저 활자의 모형인 자모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활자를 주조한 뒤 원고에 따라 필요한 글자를 뽑아(문선) 판을 짠다(조판). 김소월 시집의 서지 정보에 요즘 책에선 찾을 수 없는 주조·문선·조판자의 이름이 들어간 이유다.

2015년 박물관 열고 납활자 새로 주조
70년대 후반부터 쇠태한 활판인쇄 부활
김유정 이어 김소월 시집 새로 찍어
“첨단인쇄로는 불가능한 입체감 감동”

첫 직장 신문사 80년 통폐합으로 실직
30년 넘게 충무로 등에서 인쇄소 운영

“2015년 박물관 개원 뒤 바로 납 활자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박물관에 1950~60년대에 만든 자모가 있어 가능했죠. 그간 수십 톤의 납이 들어갔어요. 3년의 노력 끝에 책이 탄생했구요.” 시 본문과 제목은 5호와 4호, 표지와 속표지 제목엔 1호와 2호 크기 활자가 쓰였다. 크기별로 2200~2300개의 활자가 필요하단다. 활자 주조는 출판사에서 오랜 기간 이 일을 했던 정흥택씨가 맡았다. “정 선생이 매주 2~3일 박물관에 나와 만들었죠. 지난 3년 동안 만든 활자가 수백만 개나 됩니다.”
천부씩 찍은 시집은 권당 2만5천원의 가격이 매겨졌다. 요즘 시집에 견주면 2배 가까운 가격이지만 제작 원가에는 한참 모자란다. “원가를 따지면 10만원 정도는 해야 할 거예요.”
요즘 박물관 하루 관람객은 주말 기준으로 100~200명 선이라고 했다. “지난해 ‘알쓸신잡’ 방송 프로그램을 타면서 방문객이 늘었어요. 100% 입장료 수입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큰 도움이 됐죠. 그 덕에 책도 만들었어요.”
박물관의 대표 수집품은 우리나라 인구 수만큼은 될 것이라는 납 활자이다. 자모도 한글, 한자, 영문 그리고 서체와 크기 별로 수십만 자가 상자에 담겨 있다. 국내에 20대 쯤 있다는 활판 인쇄기를 10대나 전시·보관하고 있다. “외국 인쇄 관계자들이 와서 활자를 보고 깜짝 놀라요. 영문은 26자여서 활자가 한 상자면 됩니다. 우리 활자 수에 기가 죽죠.”

그에게 납 활자 인쇄의 의미는 이렇다. “전 세계적으로도 못하는 일이죠. 유럽이나 일본도 활자 생산을 못해요. 일본에서 옛 활판 인쇄 효과가 나게 책을 만들지만 우리와 달리 현대 인쇄 기술을 사용합니다.” 활판 인쇄의 매력은? 전 관장은 시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활자의 눌림에 따라 글자의 깊이와 농담이 다르면서 현재 최첨단 오프셋 인쇄에서 표현할 수 없는 입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돌 도돌 깊이가 다른 납 활자 흔적이 입체감을 주면서 책을 읽는 즐거움이 배가 될 겁니다.”

그가 활판 인쇄의 매력에 빠진 것은 만 20살 때 첫 직장인 신문사에 들어가면서다. “1980년 5공 때 언론 통폐합으로 폐간된 <신아일보> 관리직으로 1972년 입사했어요. 당시 문선공들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활자를 정확히 뽑아내는 게 보기만 해도 신기했어요. 종이에 찍혀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좋더라고요.” 타의로 신문사를 나온 그는 바로 인쇄소를 차렸다. 박물관을 연 2015년까지 충무로와 을지로에서 인쇄소 사장으로 살았단다. “개업 초기엔 활판기를 쓰다 그 뒤엔 청타기와 사진식자 인쇄 장비를 썼죠.”
전 관장에게 35년 인쇄업의 부침에 대해 물었다. “상업과 출판 인쇄를 다 했어요. 아이엠에프 금융 위기가 터지기 전 김영삼 정부 시절이 가장 호황이었어요. 아이엠에프 위기에도 다행히 저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어요. 기독교 서적 인쇄를 많이 한 덕분이죠. 아이엠에프 때 인쇄업계가 좋지 않았는데 종교 서적은 역설적으로 호황이었으니까요.”

700평 정도 되는 박물관 부지는 7년 전에 샀다. 건물을 올릴 때는 은행 돈도 빌렸단다. 시인이기도 한 홍완기 건축사가 지은 박물관은 전면이 책 몇 권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다. “50대가 된 뒤 60살이 되면 은퇴하겠다고 맘을 먹었죠. 처음엔 서울 외곽에서 북카페를 하려고 고서를 모았어요. 커피 공부도 했고요. 박물관은 꿈도 못 꿨죠.” 이렇게 은퇴 준비를 하던 그의 눈에 외국 고서점 안에 놓인 활판 인쇄기가 들어왔다. 인테리어 용도였다. 그도 활자와 인쇄기 수집에 나섰다. “(활자를 주조한) 정 선생이 전국에 활자를 공급하셨던 분입니다. 수집에 많은 도움을 주셨죠.” 박물관 개관 뒤에도 “너무 소중해서” 활판 인쇄기를 서너 대 더 샀다고 했다. 3층엔 고서도 전시되어 있다.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 초간본을 볼 수 있다.



-한겨레신문. 강성만 선임기자. 2018.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