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11-30 18:19
[최재봉의 문학으로] 문학관을 생각하며 옛날 잡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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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맨 위)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벌써 십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이겠다. 어느 날 종이 상자에 담긴 우편물이 신문사로 배달되었다. 보낸 이는 낯선 이름이었고 충청도가 주소지였다. 열어 보니, 이런 세상에나, 오래된 잡지 창간호들과 귀한 초간본 책들!
1955년 1월호로 창간되어 지금껏 결호 없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 <현대문학>은 물론, 그 전해인 1954년 4월에 나온 <문학(과)예술>, 1955년 7월호로 창간된 <예술집단>, 1956년 6월호 <자유문학> 등 50년대 잡지가 넷이었다. 여기에다가 <중앙문학>(1960년 11월), <문학춘추>(1964년 4월), <시문학>(1965년 4월), <문학>(1966년 5월) 창간호 등 60년대 잡지도 넷. 모두 세로쓰기에 2단 또는 3단 조판으로 지난 시절 정취를 물씬 풍겼다. 하나같이 누렇게 바래고 책등이 약간 훼손된 것도 있긴 했지만 보관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목차를 보니, 이건 흡사 문학사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느낌이었다. 육당 최남선과 가람 이병기의 시조를 앞세운 <예술집단>, 김동리 단편 ‘흥남철수’가 실린 <현대문학>, 최인훈 소설 <서유기> 연재 첫회분을 실은 <문학>, 김윤식과 김현이 나란히 필자로 등장한 <시문학>까지. ‘4·19 순국학도 위령제에 부치는 시’라는 부제를 달고 <중앙문학>에 실린 김수영의 ‘기도’가 특히 눈길을 끈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김수영 50주기와 촛불 정부 2년 차가 같이 저물어가는 이즈음 새삼 마음을 울린다.

오래전 모르는 독자가 보내준 옛 잡지들에 다시 생각이 미친 것은 지난달 부지를 정한 국립한국문학관에 고 하동호 교수 유족이 3만점 넘는 책과 유물을 기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였다. 2016년 2월 문학진흥법 공포로 근거가 마련된 국립문학관은 부지 문제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자료를 확보하는 일이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1억원을 호가하는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 사례에서 보듯 문학관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자면 만만찮은 돈이 소요된다. 희소성과 투자가치 때문에 쉽사리 자료를 내놓지 않는 소장자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내 유일본이라는 채만식 소설 <탁류>와 박태원 소설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같은 희귀본을 포함한 자료를 흔쾌히 기증한 유족의 용단에 박수를 보내는 까닭이다.

또 다른 작고 국문학자 등의 자료 기증 논의 역시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학관 쪽은 이런 기증과 함께 공모와 경매 구입, 기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필요한 자료를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기적의 도서관’ 설립 운동과 같은 일종의 기부 캠페인도 궁리하고 있다. 헐값에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겠다는 속셈이 아니다. 책과 유물 등 문학사 자료는 시간이 지날수록 훼손되고 망실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충청도의 독자와는 그 뒤 연락이 더 이어지지 못했다. 책장에 고이 모셔놓은 책들을 이따금씩 들춰 보며 감사의 마음을 새길 뿐이다. 60여년 전 잡지 창간호들을 통해 한 세기 남짓한 현대문학사의 숨결을 느껴보는 일은 느껍고 벅찬 경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런 호사를 혼자서 누리는 게 옳은 일일까. 하 교수 유족의 기증을 보며 새삼 갈등이 생겼다. 우연히 내게 온 이 책들도 공적인 용도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한겨레신문.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2018.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