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3-04 11:09
한국영화 100년의 얼굴, 전부 내 품 안에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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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부터 韓 영화 포스터 수집… 2400점 컬렉션 사연 책으로 펴내

"여보, 당신이 집 못 찾을까 봐 전화했어. 엊그제 이사했거든." 2002년 시인이자 다큐멘터리 사진가인 양해남은 아내에게 이런 전화를 받았다. 1989년부터 영사기며 필름이며 온갖 영화 자료를 수집해온 양씨였다. 1990년대엔 전국에 있는 영화 포스터 희귀본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희귀본 포스터를 발견하면 밤마다 '저걸 어떻게 손에 넣나' 하는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다. 포스터 사려고 밥을 굶었고 때론 빚을 냈다. 그렇게 쌓인 빚으로 결국 집까지 팔게 된 것이다. 아내는 그러나 담담했다고 한다. "새집 주소 불러줄게. 잘 찾아와." 지난주 광화문에서 만난 양해남(54)씨는 "아내가 아니었으면 수집가로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양해남씨는 흰 장갑을 낀 채 영화 포스터들을 갓난아기 다루듯 조심조심 꺼냈다. "세상에 딱 한 장씩 밖에 없는 것들이니까요." '마부' '화녀' '맨발의 청춘' '자유부인' '꽃순이를 아시나요'…. 총천연색 우리 대중문화의 역사가 책상에 하나 둘 포개졌다. /이진한 기자

어떤 집착은 집대성(集大成)이 된다. 1989년부터 2400여 점의 영화 포스터를 모아온 양씨가 올해 한국 영화 100년을 맞아 '영화의 얼굴'(사계절 刊)이란 책을 펴냈다. '수집가 양해남의 한국 영화 포스터 컬렉션'이란 부제가 붙었다. 양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한국 영화 포스터 컬렉터. 그의 포스터 중 1500여 점이 어디에도 없는 유일본이자 희귀본이다. 한국영상자료원도 그의 도움 없이는 책자 하나 만들기 어려울 정도다. TV 드라마나 뉴스 화면에 쓰이는 포스터 상당수가 그의 소장품을 복사한 것. 포스터를 모으기 위해 쓴 돈이 대충 5억여원이다. 한 일본 대학에서 "30억원 줄 테니 컬렉션을 모두 팔라"고 제안했지만 거절한 적도 있다.

충남 금산 작은 변두리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영화관은 소년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엿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아침 먹고 극장에 기어들어 가 나무 의자에 누워 하루 종일 영화만 봤다. 영화 보다 잠이 든 그를 청소부 아저씨가 등에 업고 집에 데려다준 적도 있다. 1989년 천안 한 가설극장에서 영사기와 필름을 본 뒤 수집벽이 생겼다. 특히 포스터가 그를 사로잡았다. "생각해보세요. 영화 홍보를 위해 그림부터 카피, 손글씨 서체까지 당대 최고의 사람들이 달라붙어 작업했겠죠." 가령 1967년 개봉한 영화 '안개'의 포스터는 누워 있는 윤정희를 바라보는 신성일의 옆모습을 여러 장의 스틸컷을 겹쳐놓은 것처럼 그렸다. 영문 제목인 'The Foggy Town'을 크게 써서 도회적 느낌을 살렸고 '한국 영화가 여기까지 왔다!'라는 카피로 자신감도 표현했다. 양씨는 "여기에 우리 대중문화 첨단이 녹아 있다"고 했다.

1961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은 '마부'(감독 강대진) 포스터는 전국을 돌며 가설극장을 운영했던 한 부부의 집에서 발견했다. "제게 팔라"고 했지만 그 부부는 "우리가 먹고살게 해준 귀한 영화의 포스터라 팔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갔고, 정성에 감복한 부부가 결국 벽에 붙은 포스터 액자를 떼어줬다. 양씨는 "그날 마부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꿨다"고 했다.

1978년 '똘이장군―제3땅굴편'(감독 김창기) 포스터는 친하게 지내던 영사기 고치는 할아버지가 홀로 돌아가신 뒤 그의 집을 정리해주다 발견했 다. 개봉한 지 20년도 넘은 영화 포스터를 할아버지가 지니고 있었던 건 동네 아이들을 위해 학교 운동장에서 자주 그 만화영화를 틀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인생을 넘겨받는 기분이었죠."

양씨의 꿈은 이 포스터들을 전시할 박물관을 짓는 것이다. "세상은 빨리 변하고 흔적은 자취를 감추죠. 누군가는 그 흔적을 수집하고 간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조선일보. 송혜진 기자. 20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