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11-04 09:45
아리랑 찾아 40년… "전국에 70종, 그 시대의 소셜미디어였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01/2019110102239.htm… [0]

(사진1) '아리랑 운동가' 김연갑씨는 국내외에서 아리랑을 발굴하고 채록하고 연구하는데 40년을 바쳤다. 그는 "한국인에게 아리랑은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것"이라며 "아리랑 박물관 건립과 남북 아리랑 축제 정례화 등이 남은 과제"라고 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사진2) 흥선대원군이 1865년 경복궁을 중수할 때 부역꾼을 보내라고 요청한 공문을 서지학자 김연갑씨가 펼쳐보이고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사진3) 나운규 영화 '아리랑' 광고가 실린 1926년 10월 1일자 조선일보.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사진4) 2015년 문경새재 초입에 건립된 아리랑비. / 문경시청




[아무튼, 주말]
아리랑 한평생… 서지학자 김연갑


서울 안국역에서 북쪽으로 오르막을 15분쯤 올랐다. 내장 같은 골목길 오른쪽으로 창덕궁이 저만치 보였다가 사라지곤 했다. 스마트폰으로 주소를 확인하는데 "이쪽입니다!"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김연갑(65)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한복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이 서지학자가 들어앉은 원룸에는 누렇게 빛바랜 책이 가득 차 있었다. 네 평쯤 되려나. 방이라기보다는 창고, 과장하면 토굴에 가까웠다. 그는 '막다른 집'이라 불렀다. 문헌·악보·음반·사진 등 자료 4000여 점은 어수선했지만 나름대로 질서가 있었다. 아리랑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40년을 바쳤다는 김씨는 고서점 주인처럼 무엇이든 척척 찾아냈다.

"이게 1926년 10월 1일 자 조선일보입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공돼 기념식을 한 날이었어요. 여기 광고를 보세요. 단성사에서 나운규 영화 '아리랑'이 개봉됐습니다.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동냥의 쪽박이 다 웬일인가~'라는 가사 보이지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좋은 땅에 길 내고 다 빼앗으니까 아리랑으로 저항한 거예요. 사흘 뒤엔 '가사가 불온하여 전단 1만장을 압수했다'는 기사가 실립니다."

아리랑 박사, 아리랑 독립군, 아리랑에 미친 사람…. 그에게 붙은 별명들은 아리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아리랑이 뭐기에 한 사람의 인생을 지배할까. 출발선에 선 육상 선수처럼 김씨가 심호흡을 했다. 아리랑을 찾아 헤맨 40년이 풀려나올 참이었다.


1979년 정선군 사북읍

-20대 중반에 왜 하필 아리랑에 꽂혔나요.

"단국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다 강원도 철원에서 군 복무를 했습니다. 최전방 대남방송으로 들리는 북한 아리랑은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해 뜨고 달 뜨고 별도 뜨네~'처럼 가사가 낯설었어요. 해는 김일성, 달은 김정일이었지요. 제대하고 동두천 재건학교(일종의 야학)에서 국어를 가르치는데 어느 날 미군이 찾아와 질문을 던졌어요."

-무엇을요?

"호랑이, 태권도, 아리랑이 한국의 상징이라는데 아리랑을 사전적으로 짧게 설명해달라는 거예요. 그때는 즉답을 못 했어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 질문이 저를 움직였어요."

-지금 다시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한민족의 노래라고 하겠지요. 1979년 말 강원도 정선으로 아리랑 답사를 갔는데 버스를 잘못 타 사북읍에 내렸습니다. 탄광 노동자들이 어용 노조와 저임금에 분노해 봉기한 사북사태(1980년 4월) 직전인데 그곳에서 상상도 못 한 아리랑을 들었습니다. '남양군도 검둥이는 얼굴 손이 검지만/ 우리네 탄쟁이들은 얼굴 손 가슴까지 검다네~'."

-남양군도는 어디고 가슴이 검다는 건 또 무슨 뜻인가요.

"태평양 적도 부근 남양군도(南洋群島)로 끌려가 탄광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광복 후 돌아왔습니다. 고국의 막장에 다시 들어갔는데 진폐증에 걸려 가슴까지 까맣다는 울분을 아리랑에 실은 거예요. 아, 이게 아리랑이구나. 친구들과 '아리랑 기행단'을 조직해 수집과 연구를 시작했어요."

-정선, 밀양, 진도… 지역마다 아리랑이 참 많은데.

"모두 70종이 넘어요. 강원도 인제에는 뗏목 아리랑이 있습니다. 나무를 베어 뗏목으로 강을 타고 서울에 내다 팔던 사람들을 떼꾼이라 부르잖아요. '떼돈'이 거기서 나왔고요. 울릉도 아리랑은 '울릉도 고개는 자물통 고개/ 한번 들어오면 나갈 줄 모르네~'로 흘러갑니다. 아리랑은 곡보다 가사가 더 중요해요. 경상도는 투박한 맛이 있고 전라도는 껴안는 즉흥성이 강하지요."

-노래 채록 다닐 때 일화라면.

"전남 진도에선 강아지 옆구리를 찔러도 아리랑이 나온다는 말이 있어요. 진도 옥주여관에서 그날 녹음한 아리랑을 들려줬더니 '나보다 못 부르네' 하는 겁니다(웃음). 여주인이 막걸리 한잔 걸치곤 불러 젖히는데 과연 가락을 잘 뽑아요. 어디에 가면 누가 최고로 잘한다고도 알려줬지요. 전국에 아리랑 가락이 활어처럼 펄펄 살아 있었습니다. 민초들이 불만을 토해내고, 시어머니를 욕하고, 항일 감정을 담고, 삶의 교훈을 들려주고…. 요즘 시대의 SNS(소셜미디어) 같은 역할을 아리랑이 한 겁니다. 아리랑에 얹기만 하면 확산이 됐으니까요."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남북한이 공동 입장하고 응원할 때도 아리랑을 썼지요.

"1991년 남북 탁구 단일팀 때부터 아리랑을 단가로 사용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나운규 아리랑이죠."

"아리랑에는 파벌도 순위도 없어"

아리랑 역사에서 대격변은 1865년부터 7년간 경복궁을 중수(重修)할 때 일어났다. 부역꾼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흩어졌다. 함경도·강원도·경상도 일대에서 부르던 노래 아라리가 이 과정에서 아리랑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김씨는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노래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정탐하고 기록으로 남겼다"며 "나운규의 '아리랑' 이후 아리랑이 탄압을 받으면서 가사가 지하로 흘러들었다"고 했다.

-일본은 아리랑을 어떻게 탄압했나요.

"유명한 가수를 데려와 아리랑 음반을 내면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가사를 뺐어요. 민족적 울분을 억누른 겁니다. 총독부가 1935년 유포한 '비상시 아리랑'은 모두 황군(皇軍)이 돼 비상사태를 막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내용이었어요. 1940년대엔 예술인을 동원해 군수공장에서 악극을 올렸는데 제목을 '아리랑'으로 붙였습니다. 아리랑 수난사지요."

-숨어 있는 자료를 찾는 데 도사라고 하더군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일제강점기 신문을 20년 동안 훑었어요. 기사든 광고든 연재물이든 '아리랑'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왔습니다. 구한말 외국인 대사 부인들의 모임이 '아리랑클럽'이었어요. 1999년 첫 다목적 실용위성도 아리랑 1호잖아요. 우리 문화에서 그만한 지분을 차지하는 게 또 있을까요?"

-잡지 창간호 모으는 일도 하셨더군요.

"1980년대 초 서울 상계동은 보물창고였어요.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망한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였고 헌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고물상들 틈에 끼어 잡지 창간호를 수집했어요. 1984년 서지학자 최서면 박사의 한국학연구소에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헌 공부를 시작했지요. 서울올림픽 덕도 좀 봤습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자문하기 시작하면서 방송국들이 아리랑 전문가 김연갑을 찾았으니까요."

-아리랑으로 생계가 해결되나요?

"회원들이 쌀과 콩을 보내줍니다. 수입이 박하니 가족에겐 면목이 없고요. 고종의 헤이그 밀사 호머 헐버트(1863~1949)가 1886년 아리랑 후렴구를 기록한 편지를 발굴했고, 2012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아리랑을 등재했다는 데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지학을 믿어도 될까, 하는 의구심도 있습니다만.

"저는 최서면 박사 등에게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해요. 문헌을 꼼꼼하게 대조하고 교차 점검을 합니다. 중국이 2011년 동북공정 논리로 조선족 아리랑을 국가무형문화재로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아리랑을 내팽개치고 있을 거예요. 당시 중국 대사관 앞에서 제가 시위를 하자 '한국은 아리랑을 길거리 음악으로 내버려뒀는데 왜 이제 와서 중국에 문제를 삼느냐'고 했습니다."

-진부하고 쉰내 난다며 아리랑을 배척하는 사람도 많은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요. 제가 1993년 사할린에 처음 갔습니다. 아리랑을 부르면 동포들이 알아듣고 다들 울어요. (이 대목에서 그는 울컥했다) 우리말도 모르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들었다는 거예요. 사할린 아리랑은 우리가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달라요. 흥이 나질 않고 응어리가 터져 나와요. 아리랑 하나만이라도 껴안고 있어야 나중에라도 조선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나, 하는 존재 증명 같았습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우리말은 몰라도 김치는 먹더라고요.

"11월 15일부터 사흘간 축제를 하러 또 사할린에 갑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나는 언제나 고향에 갈까~'에는 그리움과 억울함이 겹쳐 있어요. 저를 포함해 아리랑을 하는 사람들도 국내에선 대우를 못 받아요. 오히려 해외 동포들과 부둥켜안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일이라면.

"아리랑은 그냥 서정민요가 아녜요. 우리 문화가 응축돼 있습니다.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정선 아리랑을 해당 지자체가 3대 아리랑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리랑 정신에 어긋납니다. 시야를 넓혀야 해요. 아리랑에는 파벌도 순위도 없어요."

-아리랑 정신이란 무엇인가요.

"저항과 대동, 상생입니다. 아리랑은 여럿이면서 하나이고 옛것이면서도 새것입니다."

그는 "씨름만큼만이라도 아리랑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숱하게 넘었을 마음속 아리랑 고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아리랑 고개는 문경새재?… "경복궁 중수 때 아리랑 전파한 부역꾼들이 넘은 고개"

시인들은 "마음속의 고개일 뿐"

임권택 감독 영화 '서편제'에서 송화(오정해)는 아리랑을 육자배기로 구성지게 부른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진도아리랑에 왜 문경새재가 등장할까?

나운규 영화 '아리랑'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이 아리랑 고개에서 일본 경찰에 끌려가는 장면에선 "나를 위해 울지 마십시오. 나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나와 함께 아리랑을 부른 생각을 하며 불러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관객을 울렸다.

김연갑씨는 "아리랑에서 '아리랑 고개'가 없다면 영화와 시, 연극이 만들어졌을까"라며 "문경새재가 아리랑 고개라는 게 내 지론"이라고 주장했다. "삼남에서 부역꾼들이 올라올 땐 대부분 문경새재를 넘어야 하잖아요. 거기 박달나무가 많았는데 지금 가보면 없어요. 경복궁 중수 7년 동안 다 공출당한 거예요. '문경새재 박달나무는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는 게 그 말입니다. 학정을 비웃는 소리, 상실감의 표현이지요."

아리랑 고개가 어디인가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다. 시인들은 '마음속 심상의 고개일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김씨는 "여럿이 흥겹게 아라리를 불러야 하니까 후렴이 필요해졌고 음감이 좋은 말(아리랑)이 있어야 했다"고 설명한다. 밀양아리랑에도, 진도아리랑에도 문경새재 박달나무가 나온다. "1920년대 말까지는 여러 지역에서 그렇게 수용했습니다. 문경 사람들이 박달나무를 다 베어 가는 불만을 노래한 거죠."

경복궁 중수 때 강제 부역을 한 사람들이 흩어질 무렵 개항이 시작됐다. 상당수가 철도 노동자로 변했다. "회령 출신인 나운규는 철도 노동자들이 부르는 아리랑이 절절해 가슴에 담았다 영화로 만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2019.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