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2-21 16:42
근현대 디자인에 꽂힌…열혈 수집인생 30년
   http://www.mk.co.kr/news/society/view/2020/02/173231/ [2]

(사진1) 지난 17일 경기도 분당 디자인코리아뮤지엄에서 박암종 관장이 30년간 수집한 각양각색의 제24회 서울 올림픽 포스터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 제공 = 한국디자인진흥원]
(사진2) 우리나라 최초 라디오인 `금성 A-501`



사비털어 골동품 모으는 박암종 디자인코리아뮤지엄 관장

구인회 창업자 도전정신 깃든
국내1호 금성라디오 가장 아껴
일제시절 상표디자인 발굴 보람

1600여 희귀점 모아 박물관 열어
한국 디자인 역사 여기 다 있죠


시작은 좁쌀책이었다.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에서 `디자인과 실험`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실험적으로 손톱만 한 책을 만들어 출품한 게 계기가 됐다. 좁쌀책은 주요 언론에 소개됐고, 기사를 본 여승구 한국애서가클럽 회장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여 회장과의 만남이 훗날 그를 수집가의 길로 이끌었음을 그땐 예감하지 못했다.

1990년의 일이다. 지난 17일 경기도 분당의 디자인코리아뮤지엄에서 만난 박암종 관장(선문대 시각디자인과 교수·64)에게 '한국 근현대사가 담긴 디자인 유물을 30년간 수집한 계기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여 회장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당시 여 회장은 애서가클럽에서 함께 활동하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그는 이사 직함으로 합류했다. 어느 날 여 회장이 월력이 그려진 목판화 두 점을 구입해 그중 하나를 박 관장에게 줬다. '이걸 계기로 컬렉션을 해보지?' 툭 던지듯 내뱉은 여 회장의 한마디가 그를 수집가의 길로 이끌었다.

'목판화를 받았는데 소위 빈티지 냄새가 확 나는 거예요. 상당히 흥미롭고 재미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동네 책방을 다니며 책을 읽고 모으는 게 취미였는데 여 회장이 유물을 주며 수집해보라고 하니 저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었죠. 그때부터 시간만 되면 인사동에 나가 골동품을 수집했어요.' 골동품 얘기에 박 관장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그는 30년에 걸쳐 국내 라디오, 타자기, 선풍기, 냉장고, 세탁기, 휴대폰, 컴퓨터뿐 아니라 1970년대 CI 개념을 도입한 맥주병, 소주병 등 디자인이 가미된 `최초`의 산업재를 수집해왔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와 국내 첫 상표 등록 화장품인 `박가분`, 희귀한 고무신 의장등록증 등도 수집했다.

수집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시각디자인 전공자를 한국 디자인사 전문가로 만들었다. 1995년 잡지 월간 디자인 편집장 제의로 `한국디자인 100년사`를 6회에 걸쳐 연재하고, 박사 학위 논문도 디자인사에 대해 쓰면서 그의 철학과 수집 품목은 점점 다듬어졌다. 특히 여 회장이 건네준 다섯 권의 `한중일 상표도안집`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상표도안집 덕분에 박 관장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상표디자인을 연구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 디자인은 1950년대부터 본격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디자인 행위를 설명하는 글을 올리니 이게 디자인계에 잔잔한 충격을 주었다'고 말했다.

1990년부터 시작된 그의 수집 인생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매년 1억원가량의 사비를 털어 사들였으니, 30년간 약 30억원을 수집하는 데 썼다. 대부분 경매에서 사거나 딜러를 통해 직접 구입한 것이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 라디오인 `금성 A-501`이다. 전라북도 김제의 한 의사 집안 다락방에서 나온 것으로 1958년 LG전자(당시 금성사)가 출시한 국산 1호 진공관 라디오다. 이 라디오는 최근 7000만원에 경매에 붙여졌을 정도로 가치가 높다고 박 관장은 설명했다. 그는 '일본 산요사 제품을 본떴다고 하지만 그것보다 탄탄하고 단정하면서 완만한 곡선미가 있어 마치 한옥의 처마를 연상케 한다'면서 '구인회 LG그룹 창업자의 도전정신이 깃든 라디오를 어렵게 구해 전시하고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와 역사를 맞춰 보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인 이상이 장정해 펴낸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도 그가 아끼는 작품 중 하나다.

총 2만여 점이나 되는 유물을 어디에 보관하냐고 물으니 수장고 얘기를 꺼냈다. 그는 1995년부터 서울 장지동에 약 99㎡(30평)대 수장고를 마련해 각종 제품과 책, 그림, 포스터 등을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컬렉션을 모아 2008년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사립박물관인 근현대디자인박물관을 열었고, 최근 경기도 분당의 한국디자인진흥원 건물로 박물관을 이전해 디자인코리아뮤지엄을 열었다.

이곳에는 역사적 가치가 높고 희귀성이 있는 1600점을 엄선해 전시했다. 한 번도 골동품을 집에 가져간 적이 없어 박 관장의 아내는 창전동 박물관을 개관할 때까지 그가 열혈 수집가인 것을 몰랐다고 한다.

그는 '최근 디자인진흥원이 창립 50주년을 맞아 내게 공간을 제공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해줬다'며 '정부나 지자체가 공간을 마련해주고 사립박물관이 콘텐츠를 채우는 좋은 사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1950년대 진로에서 출시한 두꺼비 소주병을 구하지 못해 아쉽다는 그는 '개화기를 거쳐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놓은 디자인 결과물들을 보면 민족성을 지키면서 문화적 적응력을 가지고 활동했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며 '한국인의 저력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매일경제. 권한울 기자. 2020.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