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6-23 11:56
'매우 좃슴니다'…하버드도 샀다, 다시 태어난 우리 교과서 629책
   https://news.joins.com/article/23806161?cloc=joongang-mhome-group49 [147]

1912년 천도교에서 발행한 교과서인 『몽학필독(蒙學必讀)』에 나오는 표현이다. 김한영(58) 참빛아카이브 대표는 지난해 7월 1446년 나온 『훈민정음』 해례본부터 1969년 발간한 『국민교육헌장』까지, 523년의 편차를 두고 한국에서 나온 629권의 ‘교과서’를 영인 복간본으로 냈다.『참빛복간총서 629책』(이하 629책)이다.『훈몽자회』『삼강행실도』『노동야학독본』『보통학교국사』『바둑이와 철수』『반공독본』 등이 새롭게 살아났다. 일본어로 돼 있어도, 이념에 치우쳤어도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교재들이다.

『훈민정음』『몽학필독』등 복간총서
5년 6개월 씨름 끝 작년 1차분 펴내
프린스턴·예일대 구매, 도쿄대 예약
2차분 001번 『직지』 등 3년 내 낼 것

최근 미국의 프린스턴·하버드·예일 등 내로라하는 대학에서 수천만 원씩 들여 이 ‘629책’을 사 갔다. 김 대표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그 중 『몽학필독』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를 지난 16일 경기도 양평 산자락의 ‘참빛아카이브’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무실이라기보다 고서 보관소처럼 보였다.

Q. 『몽학필독』을 왜 그렇게 아끼나.
A. 『몽학필독』의 유전(流轉)은 한국 역사의 한 단면이다. 일제강점기에 연해주로 간 선각자들이 사범학교 교재로 썼다. 우리나라에 한 권 남아 있다. 그런데 서적 정보를 알 수 없다. 중요한 몇장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완본 형태로 된 『몽학필독』이 카자흐스탄 국립도서관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1930년대 소련 당국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가져간 것 아니겠나. 카자흐 도서관에 e-메일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1주일 뒤 답이 왔다. 사용료 100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당연히 낸다고 했다. 어찌 된 일인지 온라인 송금이 막혀 있었다. 국제우편으로 100달러를 보냈다. 이미지 파일을 받아 복간할 수 있었다.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민족사를 더듬을 수 있는 책이라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하지 않나.

Q. 왜 복간본에 매달리나.
A. 미대에 들어갔다. 서양화를 포기하고 미학을 공부했다. 시간강사로 전전했지만 내게 맞지 않았다. 이슬람 필사본을 접하고 유럽의 서체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가만,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없을까 생각했다. 『삼강행실도』『명심보감』 등 대중서를 민간에서 목판으로 인쇄한 방각본(坊刻本)이 있었다. 방각본이 성행한 17세기 이전까지는 지배계급이 지식을 독점하지 않았나.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보통학교 국어독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일장기 삽화와 일본어로 가득했다. 국어라면 한글이 있을 줄 알았다. 소홀하면 안 되겠다 싶어 우리 교과서를 찾았다. 우리의 훌륭한 문화자산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 문화를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자신감도 생겼다. 이게 ‘629책’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어 교과서가 ‘참된 빛’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이 대표로 있는 ‘참빛아카이브’라는 이름이 태어났다고 말했다.

Q. 비용과 기간이 만만치 않았을 테다.
A. 15억원이 들었다. 절반은 내 사비를 들였고, 나머지 절반은 인쇄를 맡은 한국학술정보가 댔다. 아직도 빚 독촉을 받고 있다. 아내도, 아이들도 말렸지만 포기한 상태다(웃음). 5년 6개월 걸렸다. 이런 일은 반쯤, 아니 거의 완전히 미쳐야 할 수 있다.”
Q. 훈민정음이 629책의 001번, 그러니까 첫 책으로 나와 있다. 훈민정음도 교과서인가.
A. 그렇다. 한글 창제 원리를 적시하지 않았나.
미국 대학에서 629책을 사 갔다.
최근 프린스턴·하버드·예일·듀크·UCLA에서 구매했다. 며칠 전에는 미시간 주립대에서도 구매 의사를 밝혔다. 일본의 도쿄대·릿쿄대에서도 사겠다고 했다. 5집으로 구성된 629책 중 일부를 산 뒤 추가로 구입하는 형태다. 특히 UCLA는 5000만원인 종이책에 전자책까지 더해 총 8500만원을 들였다.

프린스턴대 도서관의 이병학 사서는 “629책은 한국학 연구의 정수로, 프린스턴대의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Q. 한국 대학이나 관련 기관 연락은 없나.
A. 국내에서는 교육개발원·한글박물관·서원대·제천기적의도서관 등에서 구매한 것으로 알고 있다. 덩치가 워낙 큰 총서라 구매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반면 미국이나 일본 대학의 경우에는 기부와 펀딩을 통해 구매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할 것이다.
Q. 아쉬운 점도 있겠다.
A. 교과형 도서라는 틀을 유지하려다 보니까, 꼭 넣으려는 책을 뺐다. 현실적 제약으로 해방 이후의 북한 책이 빠져 완벽성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Q. 이번 629책이 참빛복간총서 1차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2차, 3차분도 있다는 얘기인가.
A. 1차분은 참빛복간총서가 공식 명칭이다. 2차분은 '느아옛책'(느리고 아름다운 옛 책)이란 프로젝트 이름을 붙였다. 교과형 도서인 1차분에서 빠진, 민족의 이야기가 서린 『삼국유사』『삼국사기』『난중일기』『대동여지도』 등 300~400권을 아우르게 될 것이다. 그중 001번인『직지』 복간본은 이미 완성했다. 2~3년 내로 나오지 않을까 싶다.

Q. 629책 기부도 했다.
A.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장흥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그 학교에 기부한 것이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UBC)의 로스 킹 한국학연구소장이 629책의 학술적 가치에 관심을 가져 PDF를 주기로 했다.
Q. 지난 5일 정동균 양평 군수를 만났는데.
A. 30여년 모아온 자료들을 개인이 공익적으로 이용하는 데 한계가 있어 기부형식으로 양평군에 드린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Q. 629책 복간본을 기부하는 게 아니라 가진 자료를 모두 기부한다는 말인가.
A. 그렇다. 지자체나 국가기관에 100% 기부채납할 것이다. 단, 그 쓰임새는 내가 정한다는 조건이다. 그 외에는 내가 관여하지 않는다. 북한에도 보내고 싶다. 1945년 이후로 북한 쪽 교과서는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다. 지금 남북관계가 좋지 않아 길게 보고 있다.

미국 대학 등 해외에서 학술 가치를 알아보고 구매를 잇달자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참 좋다”고 말했다. 그때 기사 앞머리에 인용한 『몽학필독』의 ‘매우 좃슴니다’란 표현이 떠올랐다.

[복간본인가 복각본인가]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백석의 『사슴』 등 근현대 시인들의 작품이 줄줄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이 있었다. 2015~2016년 1인 출판사 ‘소와다리’가 초판본의 활자와 장정, 세로쓰기까지 고스란히 복원한 복간본(復刊本)들이다. 2030들이 구매자의 80%에 달했다. 이 복간본들은 이미지 방식으로 인쇄한 것이다. 그래서 영인(影印) 복간본이란 표현을 쓴다.

1900년대 초반 사진 전사술에 기초한 영인본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1946년 조선어학회의 『훈민정음』 영인 복간본이 대표적이다. 복간본을 간혹 복각본(復刻本)으로 잘못 쓰는 경우도 있다. 복각본은 목판·금속판을 이용해 다시 인쇄하는 의미다. 복각본은 복간본의 하위 개념이다. 즉, 복간본에는 영인본과 복각본이 있는 것이다. 아단문고가 2007년 복각본 고전총서 10권을 펴냈고, 2011년에는 열화당이 ‘한국 근현대서적 복각 총서’ 시리즈를 출간한 바 있다.

김한영 참빛아카이브 대표는 “참빛복간총서 629책은 원본과 같은 크기, 같은 제본 방식을 택했다”며 “원본을 무시하고 일률적인 크기로 복간했으면 비용을 50~60% 절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오랜 시간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도 살리면서 학술적으로는 물론 서지학(書誌學)적으로도 연구할 수 있는 복간본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 중앙선데이, 2020.06.20~21,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