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13 10:09
[매경의 창] 헌책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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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에 목마르던 젊은시절
인사동 헌책방 여러번 찾았다
나를 상대도 안해주던 주인이
어느날 백석`사슴` 필사본을

내가 가끔씩 다니는 헌책방이 있다. 전에는 여기저기 좋은 고서점이 많았는데 이제는 아주 드물게 되었다.

괜찮은 헌책방이 대체로 그러한 대로, 주인이 마음에 들어 한참 전부터 줄곧 드나들었다. 책 보는 안목이 있어서 잡아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으니 애써 한 걸음을 헛되게 하지 않았다. 고물을 다루는 점포의 주인은 모질고 악착스러운 사람이 적지 않은데, 이 양반은 속이 확 트였다. 물론 고집도 있고 나이도 기껏해야 네댓 살 더 먹었지만, 세상 돌아가는 가지가지 일에 대한 촌철살인의 논평이 지혜로워서 들을 만한 것이 적지 않았다.

얼마 전 오랜만에 갔었는데, 주인 양반은 없고 아들이 점방을 지키고 있다. 아들은 가끔 아버지가 다른 볼일이 있을 때 대신 나와 있곤 했었다.

별생각 없이 "아저씨 어디 갔어요?" 하고 물었다. 무슨 심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병환이 심중해서 아마 다시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책 몇 권을 고른 다음 연구실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문득 그 양반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젊었을 때 뻔질나게 다녔던 `공씨책방` 주인은 나이 오십쯤에 심장병으로 죽었다. 학생 때 경희대 근처에 살던 시절 부근에 있던 그 책방에 들락거렸다. 주인 공진석 씨는 신동아의 논픽션 모집에서 `고서 주변`이라는 글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1980년대 초로 기억하는데, 광화문으로 점포를 옮기면서는 나에게 "우리나라에서도 고서점이 도심 한복판에 멋지게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런데 1990년 어느 가을날 학교에 있을 때 책방을 같이 지키던 그 조카딸로부터 "아재가 죽었다"고 연락이 왔다. 서대문로터리에 있는 적십자병원 영안실로 가서 쓸쓸하기 짝이 없는 조문을 했다. 얼마 후에 공씨책방은 신촌로터리 부근 언덕길 대로변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고, 얼마 전에 무슨 `문화유산`인가로 지정되어 성수동 근처에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내가 책을 목마르게 찾아다니던 1960년대 후반부터 적어도 20년 이상은 내내 북에 있는 시인·소설가·학자의 책은 여기서 아예 찾을 수가 없었다.

백석이나 정지용, 이용악과 같은 시인의 이름은 소문으로라도 들어 익혔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고들 하였는데, 그 실작(實作)은 먼 나라 얘기였다.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백순재 선생님(선생님은 일생 동안 모은, 특히 일제 때의 문학 관련 고서들을 나중에 연세대에 넘기셨다)이 우리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셨는데 언젠가 여쭈어보니 슬그머니 웃으시면서 인사동에 있는 어느 헌책방의 이름을 일러주셨다.

거기 가서 남이 안 보는 틈에 선생님 이름을 대면서 시집을 원했으나, 좀처럼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여러 번을 들락거렸더니 그제야 주인이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가 어디선가 백석의 `사슴`을, 그것도 필사본으로 들고나왔다.

`정지용 시집`은 내가 그때 살던 동네의 시장에 있는 중·고등 교과서를 주로 다루는 헌책방에서 기적처럼 구했다.

어느 날 별생각 없이 들렀더니 구석에 낡은 책들이 뭉치로 쌓여 있는데 그 사이에 그 책이 끼여 있었다. 마구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얼추 고른 다른 것들과 같이 가격을 물었더니 주인이 단돈 50원을 매겼다. 그걸 안고 달음질쳐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몰래 애지중지했다.

지금은 백석이든 지용이든 `전집`이 나왔고 누구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이야말로 그사이에 우리가 이룩한 대단한 발전이라는 것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가 아닐까? 아니면 이 역시 "라떼는 말이야"의 시시한 에피소드에 불과한가?

- 매일경제, 2020.11.13, 양창수 한양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