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2-21 13:51
[사람&] “74년 전 국어 교과서 기증하니 뿌듯” 송파책박물관에 학창 시절 교과서 기증한 강삼병씨
   http://www.seouland.com/arti/society/society_general/7640.html [1]

(사진)강삼병씨가 10일 송파구 가락동 송파책박물관에서 자신이 기증한 (1946) 교과서를 들어 보이며 흐뭇하게 웃고 있다.

해방 이후 첫 국어 교과서 포함해
갱지 잘라 만든 32장짜리 공책 등

내년 2월 교과서 특별전에 전시 예정

“내 학창 시절 책 영구보존해줘 감사”

“해방 이후, 1946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만든 3학년 국어책입니다.”

강삼병(85)씨는 지난 9월 송파구 가락동 송파책박물관에 자신이 소장해온 초·중학교 교과서와 공책 등을 기증했다. 강씨가 어린 시절부터 74년 동안 간직해온 소중한 것들이다. 송파책박물관에서 10일 만난 강씨는 자신이 기증한 책을 손에 들고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어린 마음에 이걸 버리지 않고 보관해왔다”며 “아들, 손자들도 자랑하는, 내 손때가 묻은 역사가 깃든 책”이라고 했다.

강씨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2학년이던 1945년 해방을 맞아 이듬해인 1946년 3월부터 대한민국 정부에서 처음 만든 교과서로 학교 수업을 받았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배웠던 강씨가 처음 받은 책이 한글로 된 <국어> 교과서라 무척 의미가 컸다.


강씨가 기증한 자료는 1940~1950년대 학창 시절 공부하고 필기한 초·중학교 교과서와 참고서, 공책 등 21권이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3학년 <국어>(1946), 5학년 <농사짓기>(1948), 중학교 1학년 <중등수학>(1950) 교과서, 종이가 귀했던 시절 비료포대를 이용해 실로 꿰매어 직접 겉표지를 만들고 필기한 공책 등이 포함돼 있다. 김예주 송파책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출판된 책으로 보관 상태가 무척 좋아 자료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강씨가 충남 광석면에 있는 광석공립국민학교 6학년 재학 시절 사용하던 <지능검사 시험공부>(1949) 참고서에는 당시 수업 시간표가 들어 있다. 참고서 첫 장을 넘겨보면 격자 모양의 수업 시간표에 ‘국어’ ‘잇과’ ‘셈본’ ‘보건’ ‘사회생활’ 등의 과목 명칭이 또박또박 바른 글씨로 적혀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6시간씩, 토요일은 4시간 공부한 것을 알 수 있다. <지능검사 시험공부>는 당시 국민학생이 중학교 입학 시험공부를 하기 위한 학습서의 일종이다.

강씨가 기증한 자료 중에는 중학교 수학 노트가 많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논산공립중학교에 입학한 강씨는 충남 논산군 광석면에서 논산 시내까지 8~9㎞를 통학했다.

강씨는 “그때는 물자가 귀해서 지금 같은 노트가 없었다”며 “시골 장날에 백로지(갱지) 전지 한 장을 사서 잘라 실로 꿰매 32장짜리 노트로 만들었다”고 했다.

강씨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강의한 내용을 집에 돌아와 등잔불 밑에서 꼬박꼬박 노트에 정리했다”며 “하도 정리가 잘돼 있어서인지 시험 때면 친구들한테 ‘강삼병이 노트 빌려야겠다’는 말을 들을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이번 기증 자료는 송파책박물관에서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내년 2월 개최 예정인 교과서를 주제로 한 기획특별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송파책박물관은 근현대 교과서 전시를 통해 조선 말,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한국전쟁기 등 격동의 역사 속에서 변화한 학교 모습과 교육 변화상을 조명한다. 관련 자료 200여 점을 선보인다. 2019년 4월 개관한 송파책박물관은 책을 주제로 한 최초 공립 박물관으로 지난해 12월 첫 기획특별전시 ‘노래책, 시대를 노래하다’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내 자식같이 아끼는 책인데 아들딸에게 물어봤죠. 아이들이 집에 오래 두면 종이도 삭고 보존 가치도 떨어지니, 여러 사람이 활용할 수 있도록 기증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송파구 풍납동에 사는 강씨는 10년 넘게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친한 구의원의 기증 권유를 받은 강씨는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기증하는 게 낫다고 해서 기증하게 됐다”고 했다.

강씨는 책을 오래 잘 보관할 수 있었던 비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살림도 별로 없었지만, 이사 갈 때마다 책은 한 권도 안 버리고 박스에 넣어서 먼저 옮겼습니다. 제가 책 사랑을 좀 하죠.” 강씨는 “어려서부터 책을 무척 좋아했고, 선천적으로 책을 아끼는 편”이라고 했다.

“정철의 ‘관동별곡’, 윤선도의 ‘오우가’도 다 외웠죠. 다른 책으로 보는 것보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우던 책으로 보면 머리에 착착 들어와요.” 강씨는 “헌책이라도 추억을 떠올리며 보는 게 좋다”며 “그래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 보던 책도 버리지 않고 모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강한수 장학회’ 회장인 강씨는 자신의 책들을 장학회 명의로 기증했다. 이는 1995년 육군 장교로 근무하다 순직한 아들을 기리기 위해서다. “아들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잊을 수가 없더라구요.”

강씨는 각종 보상금과 아들이 군 생활 중 저축한 예금, 조의금에 직접 사재 2억원을 보태 3억원으로 1999년 장학회를 만들었다. 현재 장학기금을 5억원으로 늘렸고, 170명에게 3억3천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내 책이 이렇게 훌륭한 건물에서 잘 보관돼 대접받으니 더없이 흐뭇하고 좋습니다. 진짜 보람있는 일을 해 뿌듯해요.”

강씨는 “송파구가 내가 학창 시절 사용했던 소중한 책들의 가치를 알아주고 영구 보존하는 것에 감사를 표한다”며 “전국 최초 공립 책박물관인 송파책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어 영광”이라고 했다. 이날 송파책박물관을 처음 방문한 강씨는 “박물관이 크게 발전하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 한겨레신문, 2020.12.18, 이충신 기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