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3-29 10:09
[방방곡곡 노포기행] "계용묵·박목월도 드나들던 동네책방, '백년서점' 꿈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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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제주 제주시 중앙로사거리 인근에 위치한 우생당 전경. 김영헌 기자
(사진2) 1950년대 우생당 서점의 모습. '사진으로 엮은 20세기 제주시' 발췌.
(사진3) 1977년 우생당이 위치한 제주 제주시 중앙로사거리 전경. 국가기록원
(사진4) 우생당 3대 사장인 고지훈씨가 1대 사장인 할아버지 고순하씨가 1950년대에 출판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영헌 기자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의 암흑기를 벗어난 1945년, 제주에서 가장 번화하던 제주시 관덕정 인근에 ‘우생당’이라는 서점이 들어섰다. 혼란스러웠던 시절 이 서점은 제주지역 초·중·고교 교과서 공급을 담당했다. 교과서를 실은 배가 제주항으로 들어오면, 부두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마차 100여 대가 교과서를 한가득 옮겨 싣고 나란히 우생당으로 향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가는 길에는 교과서를 사기 위해 제주도 곳곳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작은 서점이 광복 이후 나라와 교육을 바로 세우는 ‘역할’을 담당하며 도민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됐던 셈이다. 요즘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수준의 ‘대박’이 당시 우생당 사장 고순하(작고)씨에게 터진 것은 물론이다.

문학과 사람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우생당을 문인과 도민들의 사랑방으로 만들었다. 한국전쟁 발발로 가난하고 헐벗었던 1950∼60년대에도 서점 안에는 언제나 술과 안주가 준비돼 있었고, 문학인과 예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시 낭송회 등 각종 문화행사도 열렸다. 전쟁을 피해 제주도로 내려왔던 당시 문학판에서 쟁쟁했던 소설가 계용묵, 시인 박목월 등도 우생당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고 한다. 友(벗 우), 生(날 생), 堂(집 당). ‘친구가 생기는 집’이라는 의미로 그가 직접 지은 이름처럼, 그곳엔 매일 사람들로 북적였다.

제주도 1호이자, 가장 오래된 서점인 우생당은 제1대 사장 고(故) 고순하씨, 아들 고현권(71)씨에 이어 손자 고지훈(46)씨가 가업으로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3대를 거쳐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우생당은 제주의 가장 대표적인 노포(老鋪) 중 하나이자, 제주서점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3대 사장 지훈씨는 “우생당은 책만 파는 곳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다”며 “우생당은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이기 때문에, 76년째 걸려있는 우생당 간판을 내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계용묵·박목월도 찾았던 문화공간

우생당은 단순한 서점이 아니었다. 고순하씨는 제주 최초의 전문출판사인 우생출판사를 설립해 당시 문학인들의 잡지 ‘동인지’ 발행도 지원하는 등 50년대 제주문학 발전을 이끌기도 했다. 계용묵의 수필집 ‘상아탑’, 시 동인지 ‘시작업’ 등도 우생출판사에서 발간했다. 당시 우생당은 단순히 책만 판매하는 서점이 아닌 제주 문학·예술의 중심지이자 복합문화공간이었던 셈이다.

한참 ‘잘나가던’ 우생당도 사장인 고순하씨가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49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변화를 맞게 됐다. 1대 우생당이 문학공간과 사업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면, 2대 사장 고현권씨부터는 사업 위주로 운영됐다. 현권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사업을 운영하다 힘이 들어 서점은 접고, 교과서 판매 사업만 하려고 했다”며 “결국 아버지 뜻을 이어가기 위해 체육 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처럼 문학 쪽에는 관심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업에만 치중했다”고 말했다.


1대 사장 고순하씨 작고 후 교과서 참고서 판매로 번창

1970∼80년대 당시 교과서는 물론 참고서 시장이 컸기 때문에 서점은 한마디로 ‘돈이 되는 사업’이었다. 신학기만 되면 집 안 전체가 참고서 등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서점에도 책들을 모두 보관하지 못해 창고까지 따로 사용할 정도로 사업 규모가 대단했다. 현재 4층 규모의 우생당 건물도 1980년에 세워졌다. 그 전까지는 단층건물이었지만, 사업이 한창 번창하면서 제주도심 한복판에 건물을 올렸다. 2대 우생당도 사람들로 북적이기는 1대처럼 매한가지였다. 문학인들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제주에는 적은 인구 수에 비해 책을 많이 읽어 서점을 찾는 단골손님들이 상당했다. 또 우생당은 당시까지만 해도 제주에서 가장 번화가인 중앙로 인근에 위치해, 휴대폰이 없던 시절 만남의 장소로도 인기를 끌었다. 적어도 40대 이상 제주도민은 한번쯤 우생당에서 책이나 참고서 등을 구입하거나 우생당을 약속 장소로 찾았던 기억이 있을 정도다.

1, 2대에 걸쳐 전성기를 누리던 우생당도 시대의 변화에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1990년 후반 인터넷 서점이 등장한 데 이어 2000년대 들어 도서할인 판매가 가능해지면서 가격 할인 경쟁이 치열해졌고, 중소서점들은 생존 경쟁을 벌여야만 했다. 경쟁에서 밀린 서점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폐점한 서점들이 급증했다. 그나마 제주지역 서점들은 대형서점들이 지금까지 진출하지 않아 버티고 있지만, 20∼30년 전 ‘서점의 황금기’는 말 그대로 옛이야기가 됐다.


인터넷 서점·할인 경쟁에 위기

지역서점의 위기 속에서도 10년 전 3대 지훈씨까지 가업은 이어졌다. 지훈씨는 “건강이 안 좋아진 어머니 병간호를 아버지가 맡게 돼 서점 운영이 힘들어지자 직장 생활을 하던 제가 자연스럽게 ‘우생당 사장’이 됐다”며 “어린 시절부터 ‘우생당집 아들’로 살면서 항상 봐왔던 일이고,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가업이라 남다른 애착도 있었다”고 말했다.

지훈씨가 경영을 맡은 이후 우생당 매출은 2배나 늘었다. 그렇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위기는 여전했다. 지훈씨가 도내 학원 등을 상대로 영업을 벌여 학습지 총판 매출을 늘리면서 전체 매출은 늘어났지만, 서점 판매 매출은 나날이 줄었기 때문이다. 우생당 건물 2층도 몇 년째 비워놓은 상태다. 지훈씨는 2층을 어학 서적, 전공 서적, 공무원 수험서 등만 취급하는 특화 매장으로 운영했지만, 찾는 이들이 크게 줄면서 경영상 이유로 문을 닫았다.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인터넷 서점을 통해 필요한 책을 구입하면 며칠 후 집 앞에 배달되는 시대에 오프라인 중소서점의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훈씨는 “수년 전까지 제주지역 중소서점들은 첫째, 셋째 일요일이면 모두 문을 닫았지만, 지금은 명절 연휴 등을 제외하고는 한 권이라도 더 팔기 위해 매일 문을 열어 영업할 정도로 사정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책 매개로 사람 모이는 100년 서점 일굴 것”

가끔 나이 지긋하신 노인들이나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이들이 우생당을 찾아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 놀랐다며 반가움을 표시할 때가 자주 있다. 지훈씨에게 그 말들이 기쁘고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큰 부담감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그는 “손님들이 서점을 찾아와 ‘아직도 그대로다’라는 말을 들으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채 우생당만 몇십년 전 그대로 정체돼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든다”며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개성 강한 독립서점들처럼 우생당만의 새로움을 찾고는 있지만 쉽지가 않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그는 할아버지 생각처럼 우생당이 초심으로 돌아가 책을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 되길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공간은 돈만 들이면 수개월 내에도 만들 수 있지만,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새로운 우생당의 경쟁력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지훈씨는 “조급하게 달려갈 생각은 없다. 섣부른 접근으로 실패하기보다는 조금 늦더라도 차근차근 길을 찾아 나설 계획”이라며 “앞으로도 이 자리에서 우생당 간판을 내걸고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10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현재 제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바람이자 목표”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김영헌 기자. 2021.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