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8-08 17:15
[ESC] 평양 남북 정상회담 때 챙겨온 ‘역사적 희귀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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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 취재로 얻은 수집품. 북한 방문증명서, 공연 초대장, 연회 차림표 등 관련 자료를 보면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사진2 2007년 정상회담 당시 평양에 머무는 동안 북한 당국이 기자들에게 나눠줬던 ‘노동신문’.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나의 짠내 수집일지

2007년 노무현-김정일 남북 정상회담
방북단 전화번호부·연회 차림표도 역사
김정일 연회서 술잔 가져가라 했지만…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SBS)엔 가끔 수집광들이 등장한다. 전화기, 화폐, 소주병, 콜라병 등을 차곡차곡 모아 이미 박물관을 만들 수준의 수집 목록을 갖춘 이도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건 2019년 7월 방영된 라면 봉지 수집가 이성철씨다. 친구들이 우표나 크리스마스실을 수집하던 중학교 3학년 때 “돈이 없어 그걸 사지 못했고, 그럼 나는 라면 봉지를 모아볼까 생각했다”는 그는 35년 동안 자신이 먹은 라면 봉지 3000여장을 모았다. 그의 소장품은 1963년 처음 등장한 대한민국 라면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라면 족보’를 탄생시켰다.
짠내 수집의 또 다른 묘미는 이씨와 같은 생활 속 수집 활동이다. 없는 살림에 모든 걸 다 돈으로 사 모을 수는 없다. 경제적 부담, 가정 불화에 지속하는 게 쉽지 않다. 반면 뭐 이런 걸 다 모으냐고 비웃음을 사도 생활 속 수집은 경제적 부담 없이 만족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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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제작한 특별했던 전화번호부

기자라는 직업 특성 덕분에 가능했던 몇몇 생활 속 수집품은 소장 가치뿐 아니라 나름의 역사성도 있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간한 ‘새 정부 국정과제’, 특히 노무현 대통령 인수위 시절 번호 부여까지 해 극소수 관계자에게 배포한 ‘국정과제’는 희소가치가 매우 높다. 물론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건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관련 자료다.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은 당시 수많은 논란을 불렀다. 대통령이 처음 군사분계선을 넘어 육로로 평양을 오갔지만 임기 말에 갑작스레 성사된데다, 북한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 관람과 보수 야당의 이른바 ‘엔엘엘 포기 시비’ 등으로 곤욕을 겪었다.
청와대 출입기자로 정상회담을 취재할 기회를 얻었을 당시, 나는 뭘 수집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아내의 구박에도 사소한 물건조차 잘 버리지 못하고 일단 모아두는 습성이 발현됐을 뿐이다. 그런데 15년이 지난 지금 보면 그것이 나름 역사성 있는 수집 행위가 된 셈이다. 당시 통일부가 발행한 북한 방문증명서는 일종의 여권인데, 방문 목적에 ‘남북정상회담’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후 지속적 방문을 예상한 듯 단수가 아닌 ‘수시’로 발행했고, 방문 기간 신고·연장 공간도 20칸이나 있었다. 물론 아쉽게 한번의 방문으로 끝났다. 너무 급작스레 추진된 탓에 A4 복사지를 4등분한 크기의 8쪽짜리 복사본 ‘남북정상회담 취재 계획표’는 당시 생생한 평양 일정이 나와 있다. 허름한 일정표지만 밖으로 새 나가선 안 되는 비밀이었고, 한자 ‘秘’(비) 표시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북한 당국은 우리가 머문 고려호텔 객실에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매일 넣어줬다. 그냥 읽고 버리면 쓰레기지만 가져오니 수집품이 됐다. 10월3일치 <노동신문>엔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 도착,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접을 알리는 보도, 10월4일치엔 김 위원장이 백화원 영빈관을 방문해 노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했다는 사실,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 관람 소식 등이 담겼다.
이뿐이 아니다. 동행한 기자들은 “뭐 그런 걸 다 챙기냐”고 했지만 나는 짠내 수집 본능에 따라 옥류관 냉면을 먹을 때 나온 차림표, ‘로무현 대통령 내외분과 일행을 환영하는 연회’에 오라는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명의 초대장, 북한 문화성의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 초대장과 책자 등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챙겨왔다. 지금도 ‘칠면조 랭찜, 삼색 나물, 평양 랭면, 에스키모(아이스크림)’ 등으로 구성된 옥류관 차림표를 볼 때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에서 성과가 나지 않자 점심을 먹고 있는 기자들을 찾아와 “이러면 남쪽으로 짐 싸 들고 그냥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며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과 보도를 자제해달라던 노무현 대통령의 육성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때 가져온 가장 귀한 아이템은 당시 평양 고려호텔 객실에 비치된 전화번호부일 것이다. 당시 북한은 호텔 객실에 투숙하는 남쪽 수행단과 기자단의 편의를 위해 전화번호부를 2개 비치했다. 하나는 A4용지 절반 크기의 국제전화번호부인데, 국외로 전화 거는 방법과 통화 가능 국가와 도시를 명시했다. 더욱 각별한 건 북한이 특별 제작한 10장짜리 남쪽 수행단과 기자단 전화번호부다. 겉표지에 ‘전화번호’라는 문구와 한반도 지도, ‘2007. 10’이라는 도안이 들어간 팸플릿 형태의 허름한 전화번호부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다시 미궁에 빠져들고 있는 현시점에서 보니 그 자체가 역사적 기록이다. 당시 백화원 영빈관 1호각 1층에 머물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의 침실 호실과 전화번호는 물론 보통강여관, 고려호텔에 머물던 남쪽의 모든 수행원과 기자의 객실과 전화번호가 인쇄돼 있기 때문이다. 이 전화번호부에는 이른바 ‘귀순 어민 강제 북송 논란’에 휩싸인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해 문정인, 조명균, 정세현, 한완상, 현정은, 정몽구 등의 이름이 선명하다. 특히 이명박 정부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의 출발점이 된 박연차 태광실업 전 회장도 보통강여관 610호에 머문 것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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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면 차리느라 놓친 희귀템 ‘아른’

족보 없는 짠내 수집가가 된 지금 돌이켜 생각할 때 가장 아쉬운 건, 2007년 10월2일 저녁 7시, 평양 목란관 만찬장에서 차림표 외엔 아무것도 챙겨오지 못한 것이다. 당시 김영남 위원장 명의의 연회 초대장을 보니 나는 9번 테이블에 배정됐고, <노동신문> 주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와 청와대 홍보수석(천호선), 한국신문협회 회장(장대환) 등이 함께 앉았다. 그런데 연회가 끝날 무렵, <노동신문> 주필은 “고저~, 유리잔하고 숟가락은 좀 가져가시라요”라고 말했다. ‘게사니(거위)구이, 배밤채, 대동강 숭어국, 찔광이(산사 열매)차’ 등 13종류의 음식과 후식이 적힌 식단표는 챙겼지만, 숟가락 하나라도 가져가면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찔끔 놀랐다. ‘아니, 내 속마음을 어떻게 읽었나’ 싶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 공화국 인민들은 김정일 장군님이 베푼 이런 연회에 오면 큰 영광으로 알고 술잔이나 숟가락 하나 정도는 가져가 집안에 가보로 전합네다.”
갈등했다. 그러나 수집 본능을 억눌렀다. 무엇보다 가보로 전한다는 말이 가장 걸렸다. 내가 김정일 위원장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비칠까 우려했다. 짠내 수집에서 체면은 순간이지만, 희귀 아이템은 영원히 남는 건데…. 아무튼, 그땐 그랬다.

- 한겨레신문 2022.07.30 신승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