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5-08 17:54
[일사일언] 古書를 찾아서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4/05/03/A2BNE4T… [3]
귀한 자료를 구해 자신의 이름으로 학계에 기여하는 것이 고전문학 전공자들의 로망이다. 녹록지 않은 현실 때문이었을까. 남들이 먹고 버린 조박(糟粕)이나 열심히 핥으며, ‘가난한 문헌학도의 팔자가 이러려니’ 체념하고 지낸 세월이 길다. 선학들이 닦아놓은 길을 충실히 따라 걷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고(문)서들을 부지런히 찾아내고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는 몇몇 선학들을 유심히 관찰해왔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그 힘이 부럽고 비결이 궁금했다. 자료에 대한 갈급(渴急)의 세월. 그러나 내게도 ‘관대하고 통 큰’ 조력자들은 있었다.

‘청기와 장수’(기술을 남한테 가르쳐 주지 않는 사람)가 되면 안 된다는 신조로, 연구실에 고문서들을 비치하고 원하는 이들에게 빌려주며 조언하시던 나손 김동욱 선생, 자료들이 필요하여 연구실과 서재로 간간이 찾아뵙던 인산 박순호 선생, 고서계의 큰손으로서 가끔 탐서 여행에 동행하고 귀한 자료들을 수시로 공유하던 이현조 박사 등은 연구에 몰두하던 시절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받은 고서계의 대가 중 우뚝한 분들이다.

수시로 나손 선생 연구실을 찾아 비치된 필사본 고소설들과 시가 관련 기록들을 빌리고 질문 드리는 과정에서 자료 감식의 방법을 터득했다. 툭툭 던지시던 선생의 몇 마디 말씀들이 열 갈래, 스무 갈래 깨달음의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학문적으로 대성한, 그분의 몇몇 후학들도 대개 그런 식의 가르침을 받았으리라. 급한 자료 요청 전화에도 늘 다정한 음성으로 응해주시던 인산 선생. 찾아뵐 때마다 연구실과 서재는 ‘고서 세미나’의 현장이 되었고, 그 덕에 제법 많은 논저를 펴낼 수 있었다. 고서 감별안과 소장 자료의 질·양으로 우뚝하던 이현조 박사. 호남·영남·서울을 함께 누비며 적지 않은 보물들을 건졌다. 예컨대 조선 사신들이 중국에서 당하던 외교 참상을 생생하게 그린 ‘죽천행록’ 등은 그로부터 선뜻 양도받은 것들이다.

고서 자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시절은 더 이상 아니다. 찾았다 해도, 귀한 자료를 오래 섭렵하며 자득(自得)의 이치를 담론으로 만들 만큼 ‘끈질긴’ 시절도 아니다. 고서가 있다 하여 남에게 성큼 제공하는 낭만 시대는 더더욱 아니다.

- 조선일보 2024.05.03 조규익 숭실대 명예교수·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