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1-26 11:02
[문화칼럼/권이혁]10년만 지나면 사라지는 기록들
필자가 서울대 의대 학장을 지내던 시절(1970∼76년)의 어느 날 윤일선 명예교수께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오셨다. 선생께서는 필자가 출생한 1923년에 일본 교토(京都)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한 국내 병리학의 대부이다. 광복 후에 서울대에서 의대학장, 대학원장, 총장을 차례로 역임하고 대한민국학술원 초대 회장을 지냈다.

은퇴한 이후에도 서울대 의대 본관 2층에서 지내셨는데 내가 근무하는 학장실에 들어오자마자 “권 군, 대학에서는 공문서를 몇 년 동안이나 보관하는가”라고 물었다. “아마도 5년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윤 선생은 1923년에 교토대를 졸업하고 병리학 부수가 됐다. 부수가 하는 일의 하나는 부검(剖檢)을 할 때 교수의 명을 받아 기록하는 것이다. 졸업한 지 수십 년 후에 교토대 동창회의 초청을 받아 모교를 방문했는데 귀한 선물이라면서 받은 것이 부수 때 했던 부검 기록이었다고 한다. 선생께서는 몹시 기뻐 흥분해서 귀국하자마자 나를 방문한 것이다.

美-日문서보관 시스템 인상적

두 번째로 필자가 감동받은 것은 2008년 10월 미국 세인트폴의 골트 박사 자택을 방문했을 때이다. 서울대에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1955∼61년 공대 농대 의대 행정대학원의 교수 200여 명이 미네소타대로 가서 연수생활을 했다. 미네소타대로부터도 서울대에 자문교수가 와 있었다. 골트 박사는 1959년에 내한하여 2년간 머물면서 서울대뿐만 아니라 국내 의과교육 개선과 발전에 다대한 공헌을 했다. 필자와는 호형호제하는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가 2008년 9월 중순에 췌장암으로 곧 세상을 떠나게 됐다며 그동안의 우정에 감사한다는 e메일을 보냈다. 필자는 생전에 문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그해 10월 3일 세인트폴의 자택으로 골트 박사를 문병했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니 참으로 착잡해졌다.

동행했던 김옥주 교수와 함께 서울에서 체재한 기간에 찍은 사진을 빌려 달라고 했다. 빌려와서 복사하고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랬더니 모든 자료를 미네소타대의 아카이브즈 센터에 맡겼다고 했다.

아카이브즈는 공적 또는 사적 문서나 기록을 관리 보관하는 일 또는 장소를 말한다. 박물관이나 도서관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모두를 연결해서 운영한다는 말도 들었다. 도서관(Library), 아카이브즈(archives), 박물관(Museum)을 총칭하는 신조어(Larchiveum)가 이를 말해준다.

김 교수와 함께 미네소타대의 아카이브즈 센터로 갔다. 대단한 규모였다. 관장의 이야기로는 1만5000여 상자가 있으며 골트 박사의 것만도 500상자인데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의 문서가 들어 있는 상자 하나를 보여준다. 수십 가지 문서가 있었는데 차근차근 살펴보니까 얼마 전에 보냈던 필자의 편지와 봉투가 나오지 않는가. 나는 대단히 놀랐다. 아카이브즈라는 것이 이렇구나 하고 감탄했다.

귀국 후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아카이브즈의 중요성을 설명했더니 모든 분이 반겼다. 이 이야기가 전파되어 자연스럽게 동호인이 모여 한국아카이브즈포럼을 만들었고 필자가 대표로 선출됐다.

이 포럼은 월 1회 특강과 현지답사를 한다. 명지대에 아카이브즈학과가 있어서 이미 많은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조계사(曺溪寺) 아카이브즈,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아카이브즈, 나라기록관, 고려대 기록자료실도 방문했다.

기록 없인 역사도 없다는 점 알아야

고려대 기록자료실도 인상적이었다. 유진오 선생의 우리나라 헌법 초안을 비롯하여 인촌 김성수 선생에 관한 기록 등 참으로 값진 물품을 전시했다. 한쪽에는 고려대를 중심으로 한 스포츠 관련 전시관도 위용을 자랑했다. 나라기록관은 행정안전부에서 운영하는데 정부에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면서 왜 일반국민에게 홍보를 하지 않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왕조실록 등 세계적 자랑거리인 사료(史料)가 있어서 뿌듯함을 느끼지만 기록관리나 보존 분야는 초보 단계다. 선진국을 향해 나아가는 나라에서 선진국 기준의 하나인 기록 관리나 보관이 빈약하다는 사실은 슬프다. 모든 대학과 기관에서 아카이브즈를 올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10년이 지나면 아무 기록도 남지 않는다는 현실이 선진국으로 향하는 우리에게는 머리를 들 수 없는 치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몇몇 대학이나 기관의 노력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기록이 없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정부와 대학과 사회 모두 아카이브즈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다.

- 동아일보 2010.04.24
http://news.donga.com/3/all/20100424/277996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