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2-31 17:20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고미석]김왕식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초대관장
이곳은 ‘친근한 박물관’이다. 신석기인지 구석기인지 연대가 헷갈리는 돌도끼가 아니라 손때 묻은 전기밥솥과 석유풍로가 의젓하게 진열장에 좌정하고 있다. 이곳은 ‘가슴 뭉클한 박물관’이다. 6·25전쟁 전사자의 녹슨 철모에 남은 뻥 뚫린 총탄 구멍이, 1960, 70년대 외화벌이를 위해 독일로 건너갔던 파독 광원들이 갱도에 드나들며 나눈 ‘살아서 돌아오라’라는 인사말을 담은 영상이 시대상을 오롯이 증언한다. 이곳은 ‘신나는 박물관’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의 뜨거운 함성을 불러와 다시 한번 목청껏 ‘대∼한민국!’을 외쳐볼 수 있다. 19세기 말 개항기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상설전시실 4곳에 종합선물세트처럼 버무려 낸 이곳.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26일 개관한 서울 종로구 세종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근현대사박물관이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건립 의지를 공표한 뒤 총 448억 원의 예산을 들였다. 경제기획원, 문화체육관광부 등 주요 정부청사로 사용된 건물을 리모델링한 박물관은 정면으로 정부중앙청사를 마주보고 좌우로 경복궁과 미국대사관을 이웃하고 있다. 장소의 상징성에서도 의미가 크다.

역사에 대한 균형 감각 중시

박물관 개관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야당과 학계 일각에서 개관 이전부터 전시 내용에 역사 왜곡이 심하다는 비판을 쏟아 냈고 11월로 잡혔던 개관 날짜는 대선 때문에 12월로 연기됐다. 진보 성향 시민단체들은 개관 당일 기자회견을 열고 “소통 부재와 전문성 결여, 졸속과 편향성을 드러냈다”라며 개관 중단을 주장했다. 역사관의 대립이 빚어 낸 논란 속에서 문을 연 김왕식 초대 관장(59)을 개관 이틀 후 박물관에서 만났다. 관장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먼저 전시부터 돌아봐야 한다”라며 다시 내려가자고 재촉했다.

“일반 공개를 시작한 첫날 3400명이 찾았다. 나이별로 관심사가 크게 차이가 나더라. 6·25를 겪은 세대는 전쟁의 참상을 되짚는 곳에 오래 머물고, 386세대는 민주화 코너에, 나처럼 1970년대 초 대학을 다닌 세대는 금지곡 코너에 흥미를 보였다. 개관 전에 비판의 소리가 컸지만 막상 전시를 본 사람들은 긍정적 얘기를 많이 한다. 그간 지적받은 문제 중에서 타당한 것은 수용해 점진적으로 고쳐 나갈 생각이다.”

1층 무빙 월(움직이는 벽면)을 이용한 영상과 어린이를 위한 공간을 둘러본 뒤 3∼5층 상설 전시실을 관람했다. ‘대한민국의 태동’부터 ‘기초 확립’, ‘성장과 발전’, ‘선진화와 세계로의 도약’ 등 한국인이 걸어온 여정이 4개의 방에 요약돼 있다. 워낙 굴곡진 세월을 짧게 압축한 만큼 시각차는 있겠으나 특정인의 미화나 의도적 편향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으로 보였다.

“박물관은 우리 국민이 좌절과 시련을 극복한 도전과 성취의 역사를 담은 곳이다. 건물 앞 플래카드에 ‘위대한 국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라는 표현 그대로. 역경과 좌절을 헤쳐 온 우리 민족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짧은 기간에 성취한 것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위업이다. 그늘도 있다는 전제 아래 자랑스러운 역사를 보여 주면서 균형 잡힌 자긍심과 주체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현대사 연구에서 보수와 진보의 불통이 있으나 앞으로 연구하는 박물관을 만들어 두 진영 학자들이 소통하는 통로를 만들고 싶다.”

경제성장-민주화 압축해서 보여줘

개관 열흘 전에야 부임한 김 관장은 전문 도슨트(전시 안내인)처럼 설명이 능숙했다. “제1 전시실은 국내에 전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고종이 미국인 외교 고문관 대니에게 하사한 태극기다. 역사의 무게를 담은 다양한 태극기를 소개하면서 심장박동 소리를 결합해 영상을 만들었다.” 전시장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쓴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 유묵, 3·1 독립선언서를 비롯해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출범 사진, 1948년 런던 올림픽의 ‘조선올림픽 대표단’ 단복과 2012년 런던 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복 등을 볼 수 있다. 16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청계천 피복 노동자의 노동 현장이 재현돼 있고. 공화당의 3선 개헌안 처리와 관련한 1969년 9월 14일 동아일보의 호외에 백지광고, 자동차 수출 1호 포니 등도 선보였다.

전시관을 둘러본 뒤 관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김 관장은 연세대, 미국 미주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2년간 미주리대에서 가르친 뒤 1991년부터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현대 정치사’, ‘한일 경제협력의 정치 경제’ 등 근현대사 저서를 펴냈다.

“가르치는 일만 하다가 처음엔 얼떨떨했으나 참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박물관은 교육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이니까. 무엇보다 박물관의 기본 개념과 20여 년간 내가 가르친 한국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 학문적 기간이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일을 맡았다. 1945∼60년은 국가 건설의 정치, 1961∼87년은 귄위주의적 경제 개발의 정치였다면 1988년 이후는 민주화 시대의 정치가 이어졌다. 국가 건설이 있고 경제 발전이 있었기에 민주화도 가능했다. 우리 박물관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공간이란 점에서 내가 그간 연구해 온 것과 맥이 이어진다.”

―박물관의 정체성을 설명한다면….

“첫 구상은 대한민국관이었으나 이 경우 단순한 국가홍보관이 될 수 있어 추진 과정에서 박물관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압축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학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둘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여 주는 공간이다.”

―민감한 시기를 다뤄서 그런지 개관 전부터 전시의 편향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그간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 정치인을 미화하는 것 아니냐, 민주화운동을 홀대하고 경제성장만 강조한 것 아니냐는 두 가지 비판이 있었다. 우리 박물관은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뤄 낸 역사에 초점을 맞춘 공간이다.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 일정 부분 있지만 전시에선 국민의 역할이 더 컸음을 보여 준다. 민주화와 관련해선 경제 발전의 빛과 그늘을 이야기하면서 날로 성장해 가는 시민의식을 조명했다. 박물관을 집중 공격하던 야당 의원은 개관 전에 비서관에게 전시를 보게 했다. ‘특정 지도자를 미화한 곳이 아니다’란 보고를 들은 뒤 공격을 멈췄다. 입장료도 없으니 많이들 와서 보고, 생산적 비판을 해 주면 좋겠다. 요즘엔 편파성보다 졸속 개관으로 비판의 논조가 바뀌었다. 독일에선 12년 걸렸는데 4년 반 만에 세웠다고. 어찌 보면 이것도 우리의 저력이 아닌가.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이룬 것처럼 박물관도 집중적으로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사회 갈등 치유공간으로 만들 것

―진보 학계나 시민단체와의 소통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오랫동안 많은 분과 접촉해 의견을 수렴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반대 논리를 가진 몇몇 학자도 접촉을 시도했으나 만남을 거절한 경우도 있었다. 사람마다 시각은 다르겠으나 전시는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다. 박물관 운영이 자리 잡는 대로 진보학계와 접촉해서 소통할 생각이다. 나는 특정 이데올로기에 치중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중도파 학자로 분류된다. “난 온건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급진보 급보수는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관장을 뽑는 과정에서 나를 선택한 이유도 편파적이 아니라 중도적 생각을 가진 사람이란 점을 고려한 것 같다.” 학계에서도 보수와 진보 가리지 않고 만난다. 1990년대 초반 경실련 정치개혁위원장을 맡았지만 그 이후 시민단체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민단체가 할 일은 낙천 낙선 운동 같은 것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대학시절 골수 운동권은 아니었으나 “그때 저항은 시대정신이었다”라고 회고한다. 유신정권과 1980년대 권위주의 정부에 양식 있는 사람들이 다 저항했듯이 오늘날의 팽팽한 갈등도 시간이 흐르면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압축성장을 하면서 지역 계층 세대 갈등 같은 것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을 내려갈 때 보게 된다는 시처럼. 기존 성취를 인정하면서 점진적이고 온건한 변화를 추구할 것인가, 빠르고 급진적 변화를 택할 것인가. 진보든 보수든 국가의 권위적 행태에는 모두 저항의식을 갖고 있지만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시각이 다를 뿐이다. 보수의 경우 민주화도 중요하지만 성과도 동시에 보자는 것 아닌가.”

―왜 이런 박물관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역사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재해석하는 거다. 어느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분명 그늘도 있으나 그동안 어두운 면만 지나치게 강조되지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는 있다. 외국선 대한민국의 성공을 강조하는데 정작 우리는 스스로를 폄훼하고 있다. 균형을 맞춰야 한다. 우리 박물관은 경제 성장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그늘을 같이 놓고 보면서 활발한 토론을 통해 우리 사회 갈등을 치유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

현대사 자료 아카이브 구축이 목표

―초대 관장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현대사 관련 자료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연구를 하고, 전시와 교육을 하는 3단계 구상을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까지는 역사학자들이 주로 연구하지만 1945년 이후 현대사는 역사학자와 더불어 정치사 경제사 문화사 사회사 등 사회과학자들의 영역이기도 하다. 우리 박물관이 현대사 연구의 중심이 되려면 다양한 분야의 협력이 필요하다. 미국과 독일에 역사박물관이 있다. 프랑스는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추진으로 박물관을 건립 중이다. 이런 곳들과도 교류를 추진할 생각이다. 우리 박물관은 유물보다 첨단 기기를 많이 활용했는데 박물관 붐이 일어난 중동 국가에도 이 같은 방식을 수출해 보면 어떨까 싶다. 아쉬운 점이 많다. 공간이 작아 소장품 4만 점 중 1500점밖에 전시를 못 했다. 통사적 접근을 시도한 상설전시실 외에 주제전을 할 만한 전시실이 부족하다. 특별전을 하고 싶어도 외부 장소를 빌려야 할 판이다. 세종로는 문화의 거리인 만큼 2017년 미국대사관이 이전하면 이 건물과 합쳐 대한민국의 대표적 박물관으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

자랑할 만한 것들을 꼽아 달라고 부탁했다. “1층의 ‘우리 역사 보물창고’는 어린이 눈높이에서 근현대사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라 아이들이 좋아한다, 대한민국에서 전망이 제일 좋은 박물관이다. 5층에 경복궁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창 앞에 대통령 책상과 의자를 갖춘 방을 마련했다. 의자에 앉아 직접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외국인들도 무척 좋아하더라. 2002년 월드컵 영상을 보며 그때처럼 함성을 질러 보는 것도 가슴 뛰는 경험이 될 것이다.”

- 동아일보 2012.12.31
http://news.donga.com/3/all/20121231/519513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