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1-14 11:23
매년 1000억원 이상 지원 유리 향한 ‘깨지지 않는’ 열정 _세계의 파워 컬렉터 <8> 유리 아트 수집·후원, 미국 코닝사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뉴욕 업스테이트에는 작지만 부유한 ‘코닝’이라는 도시가 있다. 가볍고 잘 깨지지 않는 코렐 그릇으로 유명한 코닝사의 이름이 이 도시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인구 1만 명이 되지 않는 이 작은 마을을 찾은 방문객이 지금까지 40만 명이 넘었다는 사실이다. 코닝사가 70여 년 전 설립한 ‘코닝 유리 박물관(The Corning Museum of Glass)’ 덕분이다.
사실 코닝사는 신소재로서의 유리를 가장 혁신적으로 만들어온 첨단기술 회사다. 디지털 디스플레이 시대를 거의 한 세기 전부터 예견하고 연구해온 셈이다.
그런 기업이 문화재단을 만들어 지난 70여 년간 수집해온 각종 유리 관련 예술품을 전시한 곳이 코닝 유리 박물관이다. 이뿐만 아니다. 코닝 본사 건물 역시 그 자체로 훌륭한 유리 미술관이다. 건물 곳곳에서는 세계적인 유리 아트 작가 11인의 대표작을 쉽게 보고 느낄 수 있다.
기업의 DNA라 할 수 있는 유리 작품 수집을 통해 정체성을 굳건히 하고, 유리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을 지원해 이를 기업 이미지 제고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코닝사의 자세는 기업의 문화 지원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돼야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델 중 하나다.



4만5000점 보유 - 기원전 1세기 작품도
코닝 유리 박물관은 코닝사 유리 제조 역사 100년을 기념해 코닝의 설립자인 휴튼(Houghton) 일가에 의해 1938년 설립됐다. 기업용 연구개발센터가 아닌, 순수하게 유리 아트를 수집하고 후원하는 곳이다. 전시기획뿐 아니라 관련 서적도 지속적으로 발간할 정도로 전문성을 갖췄다.
코닝사는 유리 아트를 위한 재단을 설립해 매년 1억3000만 달러 이상을 후원하고 있다. 이 비용은 코닝 문화재단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박물관 컬렉션은 4만5000점이 넘는다. 기원전 1세기 유리 작품부터 카렌 라몽트, 데일 치훌리, 조시아 맥엘헤니 등 굵직한 현대 유리 미술 작가들의 작품들까지 다채롭게 보유하고 있다.
미술관 건물은 3대에 걸쳐 유기적으로 변모를 거듭해왔다. 38년 개관 당시 해리슨 아브라모위츠가 기본 구조를 만들었고, 80년 거나 버커츠가 갤러리를 추가한 데 이어 2001년에는 스미스 밀러와 호킨스가 증축에 나섰다. 이곳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티나 올드노우는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유리라는 물질을 더욱 혁신적이며 오리지널한 시각언어로 사용하는 작가를 찾아 그들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유리 작업 작가들을 현대미술 작가로 간주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 가격이 현대미술 작품보다 싼 경우가 많죠. 그렇기에 그런 작가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작품으로 컬렉션을 만드는 일이 박물관의 중요한 역할이며 문화적 기여라 생각합니다.”
그는 제프리 쿤스나 클래스 올덴버그 등 지명도 높은 현대미술 작가들이 유리로 만든 작품들을 보여주면서 “유리로 만든 작품을 단순히 유리 공예로 평가절하하는 시선은 상당히 변하고 있다. 이들이 중요한 작가로 인정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사실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행사로 꼽히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비엔날레의 메인 전시장 이상으로 미술계 인사들이 반드시 찾는 곳이 ‘팔라죠 그라시(Palazzo Glassi)’다. 유리로 만들어진 현대미술 작품을 중점 전시하는 곳이다.
이 뮤지엄이 다른 곳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유리라는 물질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광학 갤러리(Optics Gallery). 유리를 새로운 빛을 다루는 광소재로 연구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소개한다. 박물관이 과거 작품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무덤 같은 곳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공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둘째로 더 많은 자료나 경험을 원하는 방문객을 위한 배려다. 가장 주목받는 프로그램이‘더 스튜디오(The Studio: Glassmaking School)’다. 작가들에게 스튜디오를 빌려주고, 유리 제조 학교를 통해 10주간의 수업을 제공하거나 1년간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장학금을 지급한다. 또 디자이너 작가들과 유리 제조가의 협업을 유도하는 ‘글라스랩(Glass Lab) 디자인 프로그램’, 사람들이 디자인한 제품을 만들어주는 ‘You Design It; We Make It’ 등은 많은 젊은이에게 유리 산업의 미래를 직접 보여주고 꿈꾸게 한다.



유튜브로 보는 영상 ‘유리로 만들어진 하루’
코닝사의 본사 헤드쿼터 또한 대단한 유리 미술관이다. 케빈 로시가 2001년 만든, 검은빛 유리를 기하학적으로 이용한 아름다운 대형 크리스털 유리조각 같은 건물부터 눈에 확 띈다. 그 건물 내부에는 11명의 현대 유리 작가들의 놀라운 작품들이 곳곳에 설치돼 있다.
이 프로젝트는 코닝 회장인 제임스 휴튼(James R. Houghton)이 사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면서 직접 진행한 프로젝트다. 코닝사가 과거에 지원했던 작가 11명에게 유리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작품 개념을 제안한 결과다. 유리미술 분야의 전문가들과 큐레이터들을 초청하여, 함께 의논해 작가들을 선정했다. 작가들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제안을 하며 진행되었고, 몇몇 작가는 거의 일 년의 시간에 걸쳐 작품을 제작하고 설치했다.
설치된 작품은 지극히 개념미술적인 것에서부터 최고 수준의 수공예품이나 매우 감성적이고 실험적인 작품까지 다채롭다. 예술을 위한 유리의 무한한 가능성과 소통 수단으로서의 유리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들은 건물 내부에서 각각 하나의 작은 랜드마크다. 직원들은 미팅 장소를 정할 때 “몇 층 회의실에서 봐요”라고 말하는 대신 “피터 알드리지 조각 옆에서 만나요”라고 말한다.
내부를 돌아보니 유리면의 비례와 균형, 리듬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미묘한 색채가 반사되도록 작품을 만드는 피터 알드리지를 비롯해 우주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기로 유명한 데일 치울리, 유머와 환상의 개념을 추구하는 얼빈 에시, 기하학적 도형을 표현하는 스타니슬라프 리벤스키와 야로슬라바 브리초토바 커플 등의 독특한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본사에서 만난 북유럽 출신의 공학박사인 부사장 제프 에벤슨은 이렇게 말했다. “너무 좋은 작품들에 둘러싸여 지내다 보니 때로 작품의 가치를 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 실험적인 작품들은 우리가 하는 첨단 산업에 분명히 영감을 주고 있으며, 새로운 가능성에 계속해서 도전하도록 만든다.”
코닝사가 만든 영상 ‘유리로 만들어진 하루(A Day Made of Glass)’는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다. 유리 테크놀로지 디스플레이 혁명이 아주 가까운 미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는 영상이다.
코닝사의 이 같은 문화 지원 방식은 최근 늘고 있는 기업의 문화 후원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즉 코닝사의 문화 리더십은 자신의 DNA인 유리라는 물질과 연계한 개념을 박물관을 통해 ‘지속적으로’ 70년 이상 창조적인 작업을 지원하고 있는 데서 나온다는 점이다. 단순히 공예로 치부해버리지 않고 예술적 정수를 뽑아내 기업 문화의 새로운 DNA로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과 교감하고 그들의 기업철학과 연계된 이 같은 문화예술 후원은 지속 가능성이 높다는 차원에서 주목할 만하다.

- 중앙선데이 2013.01.13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8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