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3-14 09:50
17만 권 고서의 숲 … ‘서권기’는 계속돼야 한다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3/03/14/10538110.html?cloc… [221]
‘화봉문고’ 17만 권 책이 숲을 이루고 있는 서울 성북동 132번지 서고에서 김영복 문우서림 대표(사진 왼쪽)와 화봉문고 여승구 회장이 우리 고서(古書)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곰팡내인 것도 같고, 오래된 콩기름 향내인 듯도 하고, 해묵은 먼지 향 같기도 하고….

 두 사람에게선 그런 냄새가 난다. 이제는 골동품이 돼버린 고서점이 이들의 일터다. 옛사람이 말하는 서권기(書券氣), 즉 좋은 내용을 담은 책에서 풍기는 고졸한 기운이 몸 가득 서려 있다.

 30여 년 우정을 나눠온 여승구(77·화봉문고 대표), 김영복(59·문우서림 대표)씨가 오랜만에 만났다. 여 대표가 이끌어온 화봉문고 창립 50주년을 맞아 축하 인사 겸 자리를 만들었다.

 예전에는 그림보다 값이 더 나갔다는 고서. 조상들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연유에서다. 고서를 보면 우리 활자문화의 오늘이 짐작된다. 두 사람은 “고서(古書) 경기가 바닥이라 마음이 쓰리다”고 했다.



단군의 기록이 최초로 나오는 『삼국유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다. 1281년 충렬왕 7년에 일연이 목판본으로 편찬했다. ▶김영복(이하 김)=누런 똥색으로 바랜 한적(漢籍)과 수십 년 묵은 옛날 책 17만 여권에 둘러싸여 있으니 마음이 뭉클하네요. 책의 숲이라 할까. 이 많은 책을 다 보셨다고요.

 ▶여승구(이하 여)=일일이 살피고 책을 보호하는 장정, 즉 포갑(包匣)을 하면서 마누라보다 더 정이 들어요. 서투나마 일일이 제목을 붓글씨로 쓰다 보니 몇 분들이 제 서체를 호를 따 ‘화봉체’라 부르네요.

 ▶김=활자본, 근대 문학책과 교과서 분야에서 화봉문고를 따를 자가 없다고들 하는데 그 비결이 뭔지요.

 ▶여=현장이죠. 먼지 털고 마음으로 만나니 책이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전문가라고 저는 믿습니다.

 ▶김=1963년 외국 학술잡지와 신문, 서적 등을 수입하면서 이 분야에 발을 들이셨기에 균형 잡힌 시각이 장점이라고들 합니다.

 ▶여=국내외 서적을 견주어 볼 수 있는 눈이 도움이 됐죠. 다만 편애는 좀 문제였죠. 1988년에 우리 회사에 노동조합이 생겼는데 파업할 때 구호가 ‘누구를 위한 고서(古書)’인가였어요. 열심히 외국 책 팔아서 우리 옛 책 사면 절대로 안 내놓으니까 조합원들이 불만이었죠.

 ▶김=아쉬운 점은 없으신지요.

 ▶여=귀동냥으로 고서를 수집하면서 한문 공부를 곁들였다면 참 좋았겠다 싶어요. 좋은 책을 많이 모았지만 때로 수박 겉핥기가 아닌지 자책하지요.

 ▶김=1974년 제가 서울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通文館)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할 때는 한국학의 스승들이 요즘 말로 통섭(統攝)을 절로 이루며 치열하게 공부했는데요.

 ▶여=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그 정신입니다. 역사·한문·국학을 안 가르치니까 학문 전통이 안 서고 모래밭에 물붓기에요. 나라에서 국립고서박물관을 세우면 제가 뼈대를 갖춰 수집한 책들이 도움이 될까 싶어요.

 ▶김=고서점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데요.

 ▶여=1990년대까지만 해도 개인 소장가가 많아서 고서 시장이 피돌기가 됐어요. 책 드나들기가 됐다는 얘기죠. 한데 2000년대 들어서 국공립 연구소들이 고서를 사들이자 한 번 들어가면 나오는 책이 없는 겁니다. 이러니 시장이 말라버렸죠.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고요.

 ▶김=1982년 ‘서울 북페어’를 창설한 뒤 오프라인 고서 경매전, 이어 온라인 경매를 이어갔고 한국고서동우회, 한국고서협회을 열면서 국제고서적상연맹(ILAB)까지 활동 폭을 넓히셨는데요.

 ▶여=활자본에 대한 외국 학자들 관심은 지대해요. 근데 볼 수가 없잖아요. 꼭 한국에 있어야만 문화재일까요. 국보나 보물급이 아니라면 몇 권 정도는 외국에 내보내 더 널리 연구시키고 자랑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문화재보호법에 걸려서 옴쭉달싹 못하고 있는 건 세계화 시대에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아닐까 싶어요.

 ▶김=돈이 안되면 아무도 안 움직이는 게 안타깝습니다.

 ▶여=그 한 예가 목활자 연구인데요. 아무도 달려들 생각을 안 합니다. ‘화봉 서지학 문고’를 곧 개방할 예정인데 책에 관한 책 1만 권을 자유 열람하게 해 활자본 이름 정리부터 기초 분야에 학자들이 열중할 수 있게 만들 겁니다.

◆화봉문고=화봉 여승구 회장이 1963년 설립한 고서 전문 문고 및 갤러리. 50주년을 맞아 주요 수집품을 중심으로 한 전시가 이어진다. 서울 관훈동 백상빌딩 지하 1층 갤러리에서 반 년에 걸친 축하 잔치가 벌어진다. 책으로 보는 단군 5000년(3월 5~30일), 한국 고활자의 세계(4월 3~28일), 한국 문학작품 산책(5월 1~29일), 한국 교과서의 역사(6월 1~29일), 고문서 이야기(7월 1~31일), 무속사상(8월 3~31일)를 통해 주요 컬렉션을 볼 수 있다. 20일 오후 5시 개막 행사로 대장정을 열고, 8월 31일 오후 5시 한바탕 굿으로 50년 행사 막을 내린다. 02-737-0057.

-중아일보 2013.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