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4-04 10:16
기록형·유람형·자아실현형 당신은 어떤 수집가?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581176.html [182]

▲2. 강기표씨가 모은 부산영화제 티켓.

한정판 코카콜라 캔
1200점 모은 회사원
영화 포스터 수집 건축가
나열하니 역사의 재구성


궁금해야 모은다. 값싼 물건들을 모으고 간직하는 우리 시대 신종 수집가들을 기록형, 유람형, 자아실현형으로 나눠보았다. 어느 쪽이든 삶에 대한 흥미가 넘실대는 타입이다.
불타는 개인의 연대기 부산의 건축사무소 아체 에이앤피(ANP) 강기표(50) 대표는 열렬한 영화팬이다. 2012년에만 106편의 영화를 봤다. 그가 영화를 기념하는 방식은 모으고 기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은 부산영화제 티켓만 150장이 좀 넘는다. 영화의 여운을 간직하는 법은 영화 포스터를 모으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한국 영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포스터만 200~300장 정도 된다. 영화감독이나 배우들이 부산을 찾을 때면 가서 포스터에 사인도 받아 온다. 하다못해 영화 전단지라도 챙겨둔다. 그의 애장품은 빔 벤더스 감독과 프랑스 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의 사인이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영화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의식 같은 것이다. 영화라는 제단에 바치는 제물은 아무리 쌓아도 모자란다. “영화 포스터는 영상과는 또 다른 디자인의 산물이라 관심을 많이 갖습니다. 싱가포르만 가도 영화 포스터만 파는 가게들이 있고, 일본은 아예 오래된 영화 포스터를 전문적으로 거래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영화 포스터가 아예 사장되는 분위기예요.” 강 대표가 전하는 안타까움이다. 포스터와 사인, 그리고 페이스북에 적어두었던 영화 소개들을 모으면 한국 영화에 대한 작은 연대기가 된다.
수집가는 기록하는 사람이다. 동원에프앤비에서 마케터로 일하는 김근영(41)씨는 코카콜라 캔을 모은다. 첫 경험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었다. 올림픽 마스코트가 그려진 코카콜라 캔을 보고 처음으로 코카콜라 디자인에 눈떴다. 당시 마스코트 종류별로 3가지 캔을 차례로 사모은 게 시작이고, 그다음에는 내처 코카콜라 수집가의 길을 걸어왔다. ‘여가의 새 발견’전에 전시된 그의 코카콜라 캔을 자세히 들여다보노라면 캔 안에 새겨진 작은 역동의 세계에 놀라게 된다. 주로 올림픽이나 월드컵 경기에 맞춰 발매된 한정품들이라 스포츠의 세계를 담았기 때문이다. 자연 김씨의 코카콜라 수집품은 경기의 역사, 주최국의 특징들을 한눈에 그려낸다. 코카콜라 판촉물만 모으는 사람들, 병만 모으는 사람들처럼 코카콜라 수집가들도 분야가 나뉘어 있다고 한다.

2. 강기표씨가 모은 부산영화제 티켓.
“수집을 하려면 되레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게 김씨의 지론이다. 월드컵 한 해 경기를 가지고도 많으면 300~400개의 코카콜라 아이템을 모을 수 있다. 보존에 꼭 필요한 기념비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린다. “코카콜라가 왜 올림픽 패키지를 만들었는지 캐다 보니 맥락이 읽히더라”는 김근영씨의 코카콜라 소장품은 1200점 정도 된다.

생면부지 국외 동호인
페북 보며 공감대 형성
자신 닮은 인형 모으면서
수집품 통해 나를 들여다봐


모으며 지구 한바퀴 많은 수집가들이 외국에서 일상의 사물이 아름답게 재조직되는 경험을 하고 수집의 첫출발로 삼는다. 계원예술대 유진상 교수는 안식년 때 프랑스에 머물다가 플레이모빌에 눈을 떴다. 플레이모빌은 작은 블록들로 이루어진 독일 회사의 장난감을 말한다. 농장세트에서 캠핑카로 상상의 나래를 넓혀왔던 유 교수는 “한번 모으기 시작하면 더 갖고 싶고 계속해서 수집에 대한 열망이 생긴다”고 했다. 유진상 교수가 가진 플레이모빌을 모아보면 95ℓ 상자로 25개 정도 된다고 한다. 레고처럼 플레이모빌도 카테고리가 있다. 자연, 도시, 우주, 공룡, 교통 등 카테고리에서는 2~3년마다 신상품이 나온다. 그러나 수집가들은 항상 예전 모형이 더 좋았다고 말한다. 작은 피규어는 처음 나올 때는 5000원이었지만 단종되면 7만원까지 몸값이 오른다. 나온 지 오래된 건물 모형은 60만원도 넘는다. 예전 같으면 구하지 못해서 수집가들의 애만 태웠을 희귀품이다.
그러나 온라인은 수집가들의 세상을 넓혔다. 어쩌면 온라인이 수집을 부채질하는지도 모른다. 플레이모빌 동호회에서는 서로 소장품을 사고팔며 수집을 독려한다. 독일에서 태어난 플레이모빌은 온라인을 통해 세계 각지로 섞여든다. 일상의 장면을 재현하는 플레이모빌을 조립하고 카메라로 찍어 올리면 댓글들이 달린다. 예전의 수집가들은 길을 떠났지만 지금 수집가들은 다른 나라 애호가들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기웃거린다. 손꼽히는 수집가들의 페이스북은 늘 방문자들로 넘쳐난다.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희귀한 물품을 사거나 최소한 구경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인 수집가들의 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를 낳는다.
‘여가의 새 발견’전에서 특히 눈에 띄었던 스타벅스 텀블러 수집품은 회사원인 추형범(37)씨의 소장품이다. 뚜껑이 달린 평범한 잔에 불과하지만 모으고 쌓이니 거대한 스펙터클을 이뤘다. 2005년부터 모았다는 추형범씨가 가진 스타벅스 텀블러는 600개, 50상자 정도 된다. 매일 다른 텀블러로 차를 마신다고 해도 혼자 쓸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그가 일상적으로 쓰는 텀블러는 10개 남짓. 나머지는 왜 모을까. “스타벅스는 30개국, 200여개 도시에서 시즌별로 텀블러를 내는데, 텀블러를 모으다 보니 다른 나라의 디자인, 건축물이 보인다.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는 게 추씨의 설명이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텀블러는 도시 시리즈다.
물건이 나를 닮았다 추형범씨는 “예전에는 사람들이 내게 돈이 그리 많으냐고 물었다. 요즘엔 수집하는 행위를 달리 봐주는 시선을 느낀다. 스스로도 가치있는 소비에 대한 생각한다”고 했지만 수집가들에게 늘 따라붙는 질문은 여전히 ‘왜 모으냐’는 것이다. 그러나 수집품이 모으는 사람을 닮았다면 어떨까. 함께 ‘여가의 새 발견’전 한편에 전시된 눈이 동그란 인형들은 주인인 팝아티스트 마리킴을 똑 닮았다. 2000년 초부터 바비와 블라이스 인형을 모으기 시작한 작가는 언제부턴가 자기 인형과 똑같은 인형들을 그리고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모으고 만든 인형, 그리고 작가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닮았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씨도 자신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심슨 캐릭터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보는 순간 귀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는데 그건 친근함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중에 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무엇에 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느냐다.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수집품으로 자신을 꼭 닮은 것들을 모으는 사람은 행복하다.

- 한겨레신문 2013.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