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21 15:49
딱지 따먹기에 울고웃고… 조립식 장난감 “과학 교재”라 둘러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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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준 장난감 연구가

청량리는 일제강점기 유곽에서 시작돼 ‘청량리588’이라 불리는 서울의 대표적인 집창촌으로 유명하지만, 1899년부터 약 40년간 우리나라 최초의 노면전차가 다녔던 역사적인 장소다. 1930년에는 경원선, 중앙선과 경춘선의 종착역이 돼 수많은 사람들과 물류를 실어 나르던 서울 동북부의 중요한 관문이었다. 1974년에는 서울역에서 청량리역까지 지하철 1호선이 개통돼 하루 3만여 명의 인구가 이동하는 상업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경동시장과 청과물시장, 서울약령시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시장과 함께 고향을 떠나 온 이주민들의 터전이 됐던 서울의 변방 청량리.

그 청량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장군이’란 악동의 이야기다. 장군이의 아버지는 1960년대 초 홀로 서울에 올라와 섬유장사로 큰돈을 벌었다. 충청도 천안에서 대가족을 이끌고 올라와 청량리정신병원 근처의 언덕배기에 제법 넉넉한 주택을 마련하게 된다.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결혼하여 그해 장군이의 누이를 낳고, 그 다음 해 장군이를 낳았다. 고향을 떠난 아쉬움 속에서 장군이의 조부모는 첫 손녀보다도 첫 손자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을 때, 장군이가 쉬가 마렵다 하면 국그릇으로 받아 냈을 정도로 장군이만을 생각했다. 그 후광을 받은 장군이는 날이 갈수록 기가 살고 눈에 뵈는 게 없는 악동으로 자랐다.

미취학 아동이었던 장군이는 하루 온종일 동네를 싸돌아 다니는 게 일과였다. 글은 몰랐지만 만화가게에 들러 그림만 보면서 하루를 후딱 보내기도 했고, 동네 형아들과 몰려다니며 신나는 전쟁놀이도 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제일 매력적인 놀이는 불장난이었다. 동네는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오고가는 사람들로 언제나 시끌벅적했지만 바로 옆 물리대(옛 서울대 물리학과) 담장을 넘으면 넓은 공터가 나왔으므로 위험한 불장난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형아들이 능숙한 솜씨로 땅구멍을 파고 돌멩이로 바람을 막고 있으면 분주하게 마른 지푸라기를 모아 오는 것은 장군이의 임무였다. 몰래 가져온 성냥으로 확 그으면, 신기하게도 작은 불꽃이 활활 피어났다. 불씨가 꺼질라치면 조금씩 지푸라기를 얹어 ‘후후’ 불며 불꽃을 살리는 것이 불장난의 묘미였다.

어느 날은 얼리어답터였던 아버지가 6인치짜리 외제 흑백TV를 자랑스럽게 사다 놓는 통에 장군이는 넋이 나가고 말았다. 황금박쥐와 타이거마스크, 우주소년 아톰과 요괴인간 등 만화영화를 보면서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들 만화영화는 1964년 개국해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동양방송(TBC)의 만화프로그램들이었다. 보자기를 두르고 동네를 뛰어다니면 마치 나는 황금박쥐가 된 기분이었다. 하루는 장독대에서 뛰어내리다 머리가 깨져 피투성이가 되자 가족들이 기절초풍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은 장군이 또한 얼리어답터였다. 시장통 완구점은 최신 쇼핑몰이었다. 역전 앞의 백화점 ‘대왕코너’는 최첨단 멀티플렉스였다. 이곳은 1960년대 세워진 청량리 역전 앞의 유흥업소가 밀집한 백화점형 상가다. 1970년대에는 3차례의 대형 화재로 유명세를 치렀다. 사연이 많았던 가정부 누나와 함께 매일 그곳을 조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호랑이가면이 벗겨지는 타이거마스크 인형을 발견한 날은 울며 불며 인형이 품에 안길 때까지 땅바닥에 배를 깔고 사상 최대의 떼를 썼다.

“말 안 들으면 정신병원에 잡혀 간다!” 이 한마디는 세상을 독차지하던 장군이가 제일 무서워 하는 말이었다. 이는 장군이네 집 근처에 있는 청량리정신병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장군이가 떼를 쓸 때마다 어른들이 종종 써먹는 말이었다. 1945년에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정신병원이었다. 하얗고 을씨년스러운 병원 앞을 지날 때마다 미친 어른들이 생각났던 장군이는 이내 얌전한 아이가 됐다.

마을 사람들이 오가는 동네 사거리에 1주일에 한 번씩, 수레에 목마를 달고 오는 아저씨가 있었다. 10원을 내고 장군이는 지칠 때까지 신나게 목마를 흔들었다. 옆에 누군가가 함께 타고 있으면 오기가 생겨 마구 흔드는 통에 아저씨가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쯤은 리어카에 근사한 사진 무대를 만들어 덜그럭덜그럭 끌고 오는 아저씨도 있었다. 팔각정 배경의 작은 배가 딸려 있는 이동식 사진관이었다. 일명 ‘구루마사진관’으로, 장군이도 예쁘게 꾸민 다음 어머니가 데리고 나와 사진을 찍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 장군이의 놀이세계에 변화가 왔다. 구슬치기와 딱지먹기가 등장한 것이다. 장군이는 민첩성과 정확성이 필요한 구슬치기보다는 요행이 필요한 딱지먹기를 좋아했다. 구멍가게에서 파는 10원짜리 동그란 딱지는 그 안에 재미난 그림과 글이 가득했다. 게다가 실제 놀이에서 큰 아이들과 붙어도 재수만 좋으면 이길 수 있었으므로 승률이 훨씬 높았다. 글높, 글얕, 별높, 별얕 등으로 딱지에 적혀 있는 글자 수나 별의 수를 가지고 다양한 내기를 할 수 있었던 딱지먹기는 언제나 스릴 만점이었다. 하루는 2000장 정도 따는 대박을 터트리기도 했다. 밤새 딱지 그림을 보며 뿌듯해했다. 힘든 날도 있었다. 모아 놓은 수백 장의 딱지를 한방에 잃는 바람에 끙끙 앓기도 했다. 재기에 성공하기 위해 새 딱지를 사서 다시 도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장에 30장 정도 붙어 있는 딱지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딱지부자인 동네 형이 헌 딱지를 10원에 200장씩 판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구입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해가 지면 와글거리는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골목길엔 적막이 흘렀다. 그날도 가지고 있던 딱지를 홀랑 다 잃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그날은 평소에 장군~ 멍군~ 하며 장군이를 놀리는 까까머리 형제에게 당한 터라 더욱 분통했다. 마지막 남은 딱지까지 잃었을 때는 화가 나서 딱지를 땅바닥에 확 뿌리고 왔지만, 장군이 인생 처음으로 쓴맛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으면 방바닥에서 뒹굴었다. 이때 매월 나오는 어린이 잡지인 소년중앙이나 새소년 같은 월간지를 읽고 또 읽는 것이 그나마 즐거움이었다. 만화가게는 불량만화의 온상이요, 위생이 불결한 곳이라 하여 학교에서 무섭게 겁을 주었으므로,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교양잡지를 표방한 월간지들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이런 교양지의 인기도 연재되는 재미난 만화에 따라 판매부수가 결정됐다.

점차 만화 위주로 내용이 바뀌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별책부록과 장난감이 들어 있는 특별부록까지 끼워주게 됐다. 이에 그 인기는 절정에 달했고 장군이는 매월 어떤 잡지를 살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들게 됐다.

이들 잡지에는 또한 그달에 나오는 최신 장난감이나 플라모델 등의 광고가 함께 실려 있어 장군이의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어느새 용돈도 10원에서 100원으로 늘어나, 돈을 모으면 태엽으로 동작하는 근사한 조립식(플라모델의 속칭)을 살 수도 있었다. 당시 아이들이 공부는 안 하고 장난감을 사는 데 극도로 민감했던 어른들은, 특히 어떤 아버지들은 아이가 몰래 숨겨 놓은 장난감을 끄집어내 밟아 버리거나 심지어 불태우기도 했다. 겁먹은 아이들은 감히 장난감을 사거나 갖고 놀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조립해 만들면 머리가 좋아지는 과학교재’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운 조립식 장난감들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또 장난감 가지고 노냐고 고함을 치면 “이건 장난감이 아니고요, 과학교재라고요!” 하며 당당하게 외쳤으니 장군이 또한 신나게 조립하며 장래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기도 했다.

초창기의 조립식은 주로 비행기나 탱크 등 밀리터리물들이 많았다. 심지어 어떤 전투기 조립식에는 ‘적기를 알아야 애국자가 될 수 있다’던가 ‘적화야욕 분쇄하여 멸공통일 이룩하자’는 구호가 적혀 있기도 했다.

학교에 아이들이 너무 많아 콩나물시루였던 교실은 급기야 오전·오후반으로 나뉘는 2부제 수업까지 했다. 하루에 두 번 방과후 학교 앞 문방구는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학원도 과외 공부도 필요 없었던 변두리 학생들은 문방구를 들락거리며 호기심을 만끽했고 장군이 또한 언제나 100원짜리 조립식을 사가지고 귀가하는 것이 생활의 낙이 됐다.

그러나 아무래도 학교 앞 문방구에는 조악한 100원짜리들만 있을 뿐 유선리모컨으로 움직이는 탱크라던가, 모터동력의 근사한 자동차 같은 최신 조립식들은 당최 구경할 수가 없었다. 이미 조립의 경지에 오른 장군이는 좀 더 멋진 것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불타올랐다. 그 불길을 잠재울 수 있는 곳이 있었으니 명동 ‘코스모스백화점’ 내의 ‘플라모델 코너’였다. 그곳에는 듣도 보도 못한 값비싼 고급 장난감들과 미군 부대에서 나온 외제 플라모델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그림의 떡이었다. 100원의 용돈을 모아도 천년 만년 걸릴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가격 때문이었다. 장군이는 군침만 삼키고, 주인 아저씨는 변방의 꾀죄죄한 소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만원버스를 타고 힘없이 돌아오면서 세상에는 감히 넘볼 수조차 없는 거대한 벽이 있다는 것을 장군이는 그날 깨달았다.

1970년대가 저물 무렵 장군이는 한 소녀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장난보다 더 매혹적이고, 딱지먹기보다 훨씬 짜릿한 것이었다. 그녀가 쌀집 예쁜이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장군이네는 이사를 가게 됐다.

용달차에 짐을 가득 싣고 청량리를 떠나던 1978년 여름, 장군이의 놀이터 물리대학 담장 너머에는 당대 최고의 고층아파트인 ‘미주아파트’가 들어섰다.

- 문화일보 2013.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