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9-11 11:49
아카이브의 예술적 기능성을 보다
   http://www.theartro.kr/issue/issue.asp?idx=77&curpage= [296]
아카이브란 단지 모은다는 행위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모은 자료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도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자료실이나 도서관과 다른 점이다. 특정한 목적을 갖고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을 명확한 분류 기준에 따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아트 아카이브의 경우는 아카이브를 이용해 향후 어떻게 새로운 창작의 주요한 모티프로 발전될 것인지가 중요하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활용되지 않는 아카이브는 ‘보물’이 아니라 ‘고물’에 불과하다.

좌) 런던예술대학(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커뮤니케이션 센터 아키비스트/우) LUX의 16mm 필름 보관실


좌) 런던예술대학(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커뮤니케이션 센터 아키비스트
우) LUX의 16mm 필름 보관실

왜 아카이브인가?
지난 해 11월 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가 창립했다. 김달진 소장이 초대 회장, 서진석 디렉터가 부회장을 맡고 그 밖에 국내 주요 아카이브 전문가들이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총 19회의 모임을 가진 후 미술관아카이브, 아카이브전시, 학술 등으로 나누어 분과 모임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서울관 개관을 앞두고 과천관에 미술연구센터를 열어 소장 자료 13만여 점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아카이브 구축 작업을 추진 중이다. 또한 지난달에는 김달진미술연구소에서 자료 2만 점을 기증하기도 했다.

주요 미술기관에서 자료들을 모아 아카이브를 마련하는 것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아카이브 자료를 직접 전시하거나, 혹은 아카이브에서 출발해 작품과 접목시켜 전시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올해 한국에서만 보더라도, 일민미술관의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나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등 아카이브 형태의 전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 해외로 눈을 돌려 보면 아카이브 전시의 사례는 훨씬 더 다양하다. 가장 최근의 대표적 전시로는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이다.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 렘 쿨하스(Rem Koolhaas)가 예술감독을 맡은 올해 비엔날레(Architecture Biennale 2014)의 주제는 ‘근본(fundamenntal)’이었다. 그가 직접 기획한 《건축의 요소(Elements of Architecture)》전은 천장, 화장실, 창문 등을 패치워크로 엮듯이 동양과 서양, 중세와 현대를 가로질렀다. 이렇게 시공간을 넘나드는 전시의 경우, 주된 방법론은 아카이브가 채택된다. 아울러 다른 국가관들, 특히 한국 최초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한국관 역시 건축에서 모더니티의 수용 과정을 사진, 비디오, 도면 등 아카이브 자료를 주관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

좀 더 좁혀 보면 작가들 역시 창작의 과정에서 아카이브를 주된 모티프로 차용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미국 작가 크리스찬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는 〈시계(The Clock)〉(2010)라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전 세계 영화들에서 시계 장면들을 모으고 편집해 24시간 동안의 플레이 타임을 만들었다. 영국 작가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는 전시 〈이름 없는 장인의 무덤(The Tomb of the Unknown Craftsman)〉(2012)을 하기 위해 대명박물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개관 이후 전시되지 않았던 무명의 오브제를 5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해 전시한 것이다. 한국작가 중에서는 Sasa[44]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그는 2006년부터 자신이 1년 동안 먹었던 자장면과 설렁탕의 수, 교통수단 탑승 및 통화 기록 등을 모아서 매년마다 출판물 형태로 발표하고 있다.

테이트부터 소규모 아카이브까지
지난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런던에서 진행된 프로젝트 비아의 그룹리서치는 ‘아트 아카이브’라는 주제로 테이트, 내셔널 갤러리, INIVA, 플랫타임 하우스, LUX 등 런던의 주요 기관을 탐방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곳은 16mm 예술영화 필름을 모으는 LUX의 아카이브와 첼시대학교의 도서관에서 특별 관리하는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으로서의 책들이었다. 또한 런던예술대학(UAL) 산하에 있는 스탠리 큐브릭 아카이브(Stanley Kubrick Archive)는 필름을 저온으로 보관하는 특수 자료실부터 그가 생전에 영화를 제작하는 데 사용했던 의상, 스케치, 테스트 사진, 큐시트 등을 소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로 배급할 때 사용하는 자막까지 관리하는 가운데, 한국어로 된 대본을 읽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한편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Victoria and Albert Museum)의 아카이브는 오래된 궁전을 개조해, 대규모 자료실과 가구, 텍스타일, 유리, 금속, 세라믹 등 각 분야별 보존수복실이 모여 있었다. 겉의 가죽 장정이 너덜너덜해진 채, 식기와 스테인드글라스의 문양을 그려져 있는 도안첩 한 장 한 장마다 시간의 향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대체적으로 빅토리아 앤 알버트나 테이트, 내셔널 갤러리 같은 대형 미술관의 아카이브는 100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축적된 자료들을 어떤 법칙으로 분류해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 주된 목표를 두고 있다면 INIVA, 플랫타임 하우스, LUX 같은 소규모 기관의 경우는 아카이브를 통해 전시나 작품으로 발전시키는 데 무게중심을 뒀다. 한편 런던의 유서 깊은 미술관인 화이트채플(Whitechapel Gallery)에서는 2층에 따로 아카이브 전문 갤러리 공간을 두고 있는데, 방문 당시에는 스테판 윌라츠(Stephen Willates)의〈Concerning Our Present Way of Living〉전이 열리고 있었다.

좌) 런던예술대학 커뮤니케이션 센터 내 스탠리 큐브릭 아카이브/우) 스탠리 큐브릭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에 사용된 의상

좌) 런던예술대학 커뮤니케이션 센터 내 스탠리 큐브릭 아카이브
우) 스탠리 큐브릭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w Shut)' 에 사용된 의상

각 기관의 아카이브 담당자들은 저마다 자부심을 가지고,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고 있었다. 출판물은 물론, 신문 스크랩, 사진과 편지, 심지어 메모와 수첩까지… 자료 하나 하나를 소중히 아끼면서 보살피고 있었다. 한국 참가자들 역시 국내에서 미술관 아카이브에서 재직하거나, 혹은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전시 기획 및 연구를 하고 있어서인지 첫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긴밀한 대화가 가능했다. 일방적으로 기관 설명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어떻게 모으고 분류하는지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거나, 아카이브의 가치에 둘러싼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큐레이터는 ‘Curare’라는 라틴어 어원대로 보살피는(care) 사람에 근거하지만, 최근 컨템포러리 아트의 현장에서 큐레이터는 소장품 연구보다는 전시나 프로젝트를 제작하는 프로듀서의 개념으로 옮겨 가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의 아키비스트야말로 전통적 의미에서 큐레이터의 역할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리서치 기간 내내 큐레이터와는 다른 아키비스트만의 직업 정신과 목표 의식, 심지어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까지 묘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룹 리서치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면서 마련된 라운드테이블에서는 훨씬 더 많은 아키비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부에는 한국 참가자들이 한국의 아트 아카이브의 흐름에 대해서 발제를 하고, 2부에서는 런던에서 활동하는 아키비스트들과 함께 각기 다른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아카이브의 무한한 가능성을 환기시켰다. 더불어 평일 낮 시간에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석을 가득 채울 만큼 런던 문화예술계에서도 아카이브가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미술에 대해서도 관심이 뜨거움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좌) LUX에서 필름 정리중인 스탭/우)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의 코스튬 수복

좌) LUX에서 필름 정리중인 스탭
우)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의 코스튬 수복


비아, 리서치와 네트워크의 아카이브로!
이번 그룹 리서치는 예술경영지원센터와 런던의 ARILS(UK & Ireland Art Libraries Society)가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오랜 기간의 준비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또한 참가자들 역시 출국 전부터 사전 모임을 진행하면서 프로그램 구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분에 현지에서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를 대상으로 국제적 활동을 지원하는 프로젝트 비아의 프로그램은 국내 공기관의 지원 제도 중에 가히 혁신적이라고 할 만하다.
문예진흥기금 지원 공모 사업이 문화예술 창작 활동의 중요한 계기로 자리 잡은 것이 대략 10년 전이다. 공공의 예산을 사용하는 것인 만큼 공익적 목표를 띠고 있으며, 특히 가시적 결과물을 즉각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에 반해 프로젝트 비아는 지금 당장의 결과물보다는 향후 문화예술의 잠재적 가치와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리서치와 네트워크’라는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예술 컨텐츠의 개발로 눈을 돌린 것이다.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문화예술 인력에게 이러한 경험들은 또 하나의 아카이브처럼 차곡차곡 쌓여 향후 10년, 길게는 50년 뒤에 일어날 여러 활동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호경윤

글. 호경윤
현재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동덕여대 큐레이터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전문사 수료. 《출판_기념회》전(2008, 갤러리팩토리) 기획. 2013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부커미셔너 역임. http://www.sayh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