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10-11 13:23
[집중취재] 세계인 사로잡은 첫 '한류 스타' 무용가 최승희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6/10/10/20161010002747.html?OutUr… [247]

(사진1: 이국적인 복장을 한 최승희가 나뭇잎 무늬의 천을 배경으로 인상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김영희 김영희춤연구소 소장은 “이시이 바쿠에게 모던 댄스를 배우고 난 후인 1930년대 초 작품 같다”며 “배경의 막으로 미루어 볼 때 작품이 아니라 사진촬영을 위해서 포즈를 취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사진2: 최승희가 1938년 7월 20일 미국 뉴욕에서 지인에게 쓴 친필 서신.이 편지에는 공연 내용과 관객 반응, 미국 예술계 분위기와 자신의 무용관, 미국 내 한인사회에 대해 적혀있다.)
(사진3: 최승희의 모습을 담은 1930년대 후반 일본 기념 엽서로 뒷면은 스페인어로 적혀 있다. 최승희가 부두로 보이는 곳에서 꽃다발을 든 채 지인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동서양인이 섞여 있는 것으로 미뤄 미국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4: 최승희가 ‘아리랑’을 공연하는 모습과 뒷면 기록. ‘아리랑’ 공연 사진은 그간 많이 공개됐지만, 이 사진은 뒷면(사진 안)에 정확한 촬영일시와 장소, 카메라 기종, 렌즈와 필름 등이 자세히 기재된 점이 특징이다. 이에 따르면 최승희는 1936년 3월13일 오전 8시 일본 도쿄 제국호텔에서 ‘아리랑’을 선보였다.)



'전설의 무희' 최승희 희귀사진 공개/
16살 때 일본 유학… 이시이 바쿠 수제자로 /
한국 돌아온 후 칼춤·부채춤 바탕 창작무 선봬 /
미국·유럽·중남미… 전세계 돌며 공연 /
피카소, 춤추는 모습 스케치해 선물하기도



전설의 무희 최승희(1911∼1967)의 희귀· 미공개 사진과 친필 서신 등이 발굴, 공개됐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은 최승희의 사진 원본 700여장과 1930년대 국내외 신문기사 스크랩 중 미공개·희귀본을 최근 본지에 전해왔다. 이 자료는 최승희의 지인이 그동안 창고에 보관한 것이다. 차 이사장은 “복사본이 아닌 원판 사진 수백장이 공개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며, 기존에 공개됐던 사진들도 뒷면에 찍은 날짜와 장소, 사진가 등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어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며 “최승희 춤을 연구하는 데 귀한 자료가 되리라 본다”고 밝혔다.

최승희는 고전무용의 현대화를 추구한 ‘최초의 한류 스타’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조선인이라는 한계를 딛고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최승희가 무용을 배우기로 결심한 건 1926년 경성에서 일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무용발표회를 보면서였다. 당시 우리 나이로 16살이던 최승희는 사범학교에 합격하고도 나이가 어려 진학하지 못한 상태였다.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다.

3년간의 배움을 마치고 1929년 서울에 돌아온 그는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한다. 이 시기 그는 칼춤, 부채춤, 승무 등을 바탕으로 다수의 창작무를 선보인다. 일본에서의 명성도 높아진다. 1934∼35년 도쿄에서 연 제1, 2회 무용발표회는 대성공을 거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최승희를 일본 제일 가는 무용가로 평하기도 했다.

1937∼40년에는 미국, 유럽, 중남미 공연에 나선다. 최승희는 당시 심정에 대해 오빠 최승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조선의 리듬, 더 크게 말하면 동양의 리듬을 갖고 서양으로 싸우러 건너갑니다”라며 “어떤 경우에라도 민족은 망하지 아니하고 그 민족의 예술도 결단코 망하지 않는다고요”라고 밝힌다.

최승희는 미국 10회, 프랑스 23회, 네덜란드 11회, 벨기에 9회, 중남미 61회 등 150회 이상의 서구 공연을 했다. 호평이 쏟아졌다. “동양에서 온 가장 탁월한 무용가”(로스앤젤레스타임스), “세계 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가 중 한 사람. 그의 예술은 사람들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뉴욕타임스), “그의 광기 넘치는 춤을 본 사람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할리우드 뉴스) 등의 보도가 이어졌다.

1939년 최승희의 뉴욕 길드극장 공연은 작가 존 스타인벡, 배우 찰리 채플린,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등이 관람했다. 프랑스 파리 공연 때는 피카소가 객석에서 최승희의 모습을 연필로 스케치해 선물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가장 인기를 끈 작품은 ‘초립동’이었다. ‘초립동’을 춘 후 일주일 만에 파리에서 초립동 모자가 유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명성에 힘입어 최승희는 1939년 벨기에에서 열린 제2회 세계무용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

해방 이후 최승희는 1946년 평양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무용연구소를 설립한다. 그러나 1958년 남편 안막이 숙청되고 나서 그의 삶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1967년 최승희 역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한동안 최승희는 한국에서 잊혀지다시피 했다. 차 이사장은 “지난해 11월 24일 최승희 선생이 살던 집에서 선생의 천도재를 지내준 적이 있다”며 “그 인연으로 최승희의 지인이 자료를 들고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차 이사장은 오는 12월 ‘뮤지컬 최승희’(가제) 제작 발표회를 겸한 최승희 사진 전시 및 무용 공연을 준비 중이다. 차 이사장은 “최승희 선생의 후손과 가족을 위한 헌정의식의 무대와 이제까지 발표되지 않은 자료들을 감상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 세계일보. 송은아 기자. 2016.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