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5-25 10:28
[물성예찬]<11>예술제본 전문가 조효은 씨
   http://news.donga.com/3/all/20120525/46506051/1 [421]
《 유럽을 여행하다가 고성(古城)을 방문하면 왕가나 귀족들의 도서관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이나 영화 ‘해리포터’에서 봤음 직한 중세의 도서관에 들어갈 때마다 드는 궁금증이 있었다. 현대의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모두 울긋불긋 모양이나 색깔이 다른데, 중세 도서관의 책들은 어떻게 수만 권이 한 곳에서 나온 것처럼 비슷한 색깔의 가죽장정과 금박문양 표지에 싸여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옛 유럽 왕가나 귀족들은 전속 제본가를 두고 평생 책을 제본하게 했지요. 중세에는 책을 낱장으로 인쇄해 표지도 없이 최소한의 실로 묶어 팔았어요. 그래서 똑같은 내용의 책도 소장자나 제본가에 따라 독특한 문양을 가진 표지를 갖게 됐지요.” 》

서울 마포구 상수동 홍익대 부근에 있는 예술제본 전문공방 ‘렉토베르쏘’의 대표 조효은 씨(33). 전자책(e북)이 대세인 21세기에 그는 종이책을 직접 손으로 꿰매고, 가죽을 다듬고, 문양을 입혀 책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작업에 푹 빠져 있는 장인이다.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김아중이 맡은 여주인공 직업이 예술제본가였다.

‘렉토베르쏘(Recto Verso)’란 책의 앞장과 뒷장을 뜻하는 라틴어. 1999년 파리예술제본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백순덕 씨가 국내 최초로 문을 연 예술제본 전문공방이다. 2008년 백 씨가 4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뒤엔 수제자였던 조 씨가 공방을 운영하며 수강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곳에서 전문과정까지 마친 예술제본가는 국내에 15명 정도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2001년 대학 경영학과에 다니던 중에 TV를 통해 예술제본을 알게 됐죠. 처음엔 취미로 배웠는데, 석 달 후에 ‘평생 이 일을 하고 싶다’는 맘이 들더라고요. 학교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고, 10년 넘도록 공방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술제본은 건축과 비견된다. 책이라는 구조물을 낱장으로 일일이 떼어내는 해체작업을 거쳐 보수와 복원을 하고, 다시 조립하는 60개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공방에는 프랑스에서 직수입한 프레스, 조합기, 재단기, 책을 매달아 실로 꿰매는 수틀, 망치, 톱과 같은 크고 작은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종이와 노끈, 실, 풀, 헤드밴드용 비단 등 재료만도 50가지가 넘는다.

“3년 전 한 노신사가 독일에서 구한 괴테의 ‘파우스트’ 초판본을 제본해 달라며 왔어요. 워낙 귀한 책이라 작업하면서 꽤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서양의 제본문화를 알고 계셨어요. 굉장히 사소한 것까지 꼼꼼히 주문하셨는데, 작업자로서 귀찮다기보다 제 일의 가치를 알아봐 주시는 게 정말 고마웠습니다.”

책 한 권에 80만∼100만 원, 기간도 최소 두 달에서 1년씩 걸리는 예술제본을 맡기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문학과지성사는 ‘깊이읽기’ 시리즈의 동인 회갑연 때마다 저자 선물용으로 제본을 의뢰해 왔다. 아내의 박사학위 논문, 20년 동안 쓴 자녀의 육아일기를 세상에 한 권밖에 없는 책으로 만들어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조 씨는 “제본가란 인류의 지적자산인 책에 새로운 생명력을 주어 시대와 시대를 이어주는 전달자”라며 “책을 사랑하는 인문학적 지식과 예술적 감각, 은근과 끈기가 필요한 직업”이라고 말했다.

“의뢰인이 가져오는 새로운 책을 만날 때 가장 설렙니다. 제본을 하다 보면 책 속에서 메모지도 발견하게 되고, 네잎 클로버도 만나게 됩니다. 책이란 단지 지식만 얻고자 읽는 게 아닙니다. 그것뿐이라면 전자책으로도 충분하겠죠. 책의 무게감, 감촉,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얻는 감성적 위로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종이 질부터 일러스트, 편집까지 정성이 깃든 책을 저는 사랑합니다.”

-동아일보 2012.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