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0-22 10:57
해외 벼룩시장 누비며 30년 모은 ‘추억’ 500점

뉴욕에서 유학 중이던 디자이너 지망생은 1982년 어느 날 신문 기사를 봤다.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 인터뷰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정장을 차려 입고 스케치 작업을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더구나 셔츠 소매단에 커프스버튼을 하는 것까지 빼놓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멋진 습관을 갖고 있다니 역시 패션의 대가답군! 디자이너 지망생은 그를 따라 하고 싶어졌다. 한데 정장은 몇 벌 있었지만 커프스버튼은 낯설었다. 그 뒤 눈에 띄는 대로 하나 둘 사기 시작했다.

디자이너 서정기(53)의 커프스버튼은 이제 500개가 넘는다. 유학 생활 중 100여 개, 나머지는 그 이후에 더해졌다. “그렇다고 라거펠트와 같은 습관이 생기진 않았어요. 다만 커프스버튼이야말로 슬쩍 멋부리고 싶은 남자의 최고 액세서리라는 게 매력적이었죠. 남이 안 봐줘도 하고 있으면 스스로 뿌듯하니까요.”


그중엔 에르메스·티파니 등 유명 브랜드 제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각국 벼룩시장에서 찾아낸 것들이다. 유학 시절 때 쇼핑 노하우가 그대로 이어졌다. 당시 그는 커프스버튼을 사기 위해 토·일요일 오전엔 꼭 벼룩시장에 들렀다. 맨해튼 6번가인 ‘애비뉴 오브 아메리카’와 콜럼버스 서클 주변이 공략 대상이었다. 거기서 도나 카란(미국 대표 디자이너)이나 앤디 워홀과도 자주 마주치곤 했다.

시장 몇 바퀴를 돌다 눈에 띄는 물건이 생기면 주저하지 않았다. 대개 10달러, 비싸도 50달러를 넘지 않는 커프스버튼을 사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다. 빅토리아 시절 제작된 사각 디자인,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조지 젠스의 초기 제품, 유색 스톤의 빈티지 스타일 등을 건졌다. 그는 어디서,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 샀는지 또렷이 기억했다. 커프스버튼 수집을 두고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모으는 것”이라고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흰 바탕에 파란 용무늬가 그려진 커프스버튼을 꺼내들었다. “이건 디자이너 페리 엘리스의 마지막 컬렉션과 굉장히 비슷해서 골랐어요. 마침 같은 용무늬 타이가 있어서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죠.”

지금도 뉴욕·파리·상하이 등으로 출장이나 여행을 가면 항상 토·일요일을 포함시킨다. 그러면서도 떠나기 전 늘 같은 꿈을 꾼단다. “비행기가 일요일 낮 12시에 도착하는 거예요. 그럼 부랴부랴 벼룩시장으로 뛰어가죠. 그런데 상인들이 이미 짐을 싸고 있고, 그 짐 속에서 너무나 갖고 싶은 커프스버튼을 발견하는 거예요. 얼마나 꿈 속에서도 식은땀이 나는지.”

어느 것 하나 남에게 줄 수 없다는 그이지만 특별히 소중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할아버지·아버지를 이어 내려온 줄무늬 순금 제품이다. 아버지 역시 누나들 결혼식 날에나 할 만큼 아끼던 것이다. 그는 “여자들이 반지를 대물림하듯 이 커프스버튼도 값을 따질 수 없는 가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 중앙선데이 2012.10.21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7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