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1-24 16:49
고색창연한'보물창고'… 더 가까워지다, 새로워진 가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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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중턱 동떨어져 있던 건물길가에 새단장 … 접근성 좋아져
간행물 창간호 1만6000여점고문서 등 1만1000여점 전시
기획실서 증축개관 기념'조선시대 한의학' 특별전

겨울 하늘을 반사하는 유리들이 산을 배경으로 새파랗게 반짝인다. 여러 빛깔의 물감을 뒤집어 쓴 듯 형형색색으로 물든 청량산의 단풍은 유리건물을 도드라져 보이게 만들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왼쪽으로 의학사료관이 눈에 들어온다. 맞은 편 입구는 '창간호실'이라고 적혀 있다. 우리 나라 잡지의 창간호만 모아 전시해 놓은 방이다. 창간호실에는 개벽, 학생, 여성 등 수십 권의 책들이 누렇게 빛바랜 채 고색창연하게 빛나고 있다.

증축으로 새 단장을 한 '가천박물관'(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은 이전보다 훨씬 넓고 가깝게 다가왔다. 우선 가파른 언덕 중턱에 동떨어져 있던 박물관 건물이 길가 쪽으로 많이 내려와 접근성이 좋아져 있었다. 길가 쪽에 증축한 건물엔 '기획전시관'과 '창간호'실이 새롭게 들어섰고, 증축에 따라 영상관과 수장고 규모도 커졌다. 지난 20일 새 단장을 한 가천박물관을 찾았다.



◆창간호실

가천박물관 창간호실에선 우리 나라 정기간행물 창간호들을 전시 중이다. 가천박물관은 신문, 잡지 등 1만2000여개의 창간호를 소장하고 있다. 심효섭 학예실장은 창간호를 모으게 된 계기에 대해 "지난 95년 이희경 선생이 창간호 4000여개를 기증한 이후 이길여 회장님과 이귀례 관장님께서 계속 수집을 했다"며 "창간호는 현재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창간호는 그 간행물이 발행되던 시기의 시대상황과 정신, 문화가 녹아 있다"며 "특히 발행의 목적과 취지가 가장 분명하게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덧붙였다.

현재 창간호실에서 열리고 있는 '광복을 향한 한줄기 염원-일제강점기 잡지 창간호' 전에선 일제강점기 간행된 창간호를 시대별로 구분하고 당시 발간된 잡지의 성격을 통해 그 시대상을 알아보기 위해 기획됐다.

전시 콘셉트는 한국 잡지의 태동기(1896~1910), 언론·출판의 침체기(1910~1919), 한국 잡지의 발전기(1919~1937), 민족의 암흑기(1937~1945)로 구성됐다.

'한국 잡지의 태동기'(1896~1910)는 정기간행물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다. 한국 잡지의 태동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잡지는 <낙동친목회학보>와 같이 표면적으로는 유학생 간의 친목을 표방하나 독립자주사상의 고취와 새로운 학술정치사상의 계발과 수용을 목적으로 발간됐다. '호남학회', '기호흥학회' 등의 학회에서 발간한 학회보가 발간되기도 했다. 1908년 11월 최남선에 의하여 창간된 <소년(少年)>은 잡지문화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근대 잡지의 효시로 일컬어지고 있다.
 
▲ 영상실


'언론·출판의 침체기'(1910~1919)엔 출판매체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던 시기다. '출판법'에서 문예·교양물만을 허가함에 따라 이 시기의 잡지는 종교·기술 분야와 문학전문지들만이 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 간행된 잡지는 총 49종 뿐으로 그 중 <아이들보이>, <선민>, <창조> 등의 잡지가 대표적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은 한국에 대한 기본정책을 완화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한국 잡지의 발전기'(1919~1937) 잡지는 내용이 종합지 형태로 발전하며 학술전문지 형태의 편집이 시도된다. 그 출발은 <개벽>의 등장에서 찾을 수 있다. <한글>은 전문학술지의 모습으로써 민족사상 고취의 상징이 됐으며 <진단학보(震檀學報)> 역시 한국학의 학풍을 수립하고 그 권위를 형성하는데 구체적 기여를 했다. 이 기간 발행된 잡지의 총 수는 622종으로써 시도되지 않았던 잡지의 분야가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잡지가 발행됐다.

'민족의 암흑기'(1937~1945)인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어 교육과 사용을 금지하기 시작했고 1936년 <신동아> 폐간, 194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모든 한국어 신문 을 비롯해 거의 모든 간행물들이 폐간됐다. 그 결과 이 시기에 발간되는 잡지들은 친일성향의 잡지들만이 존속할 수 밖에 없었다. 1944년에 한국인 발행 잡지는 22종으로 위축된 것을 보더라도 이 시기의 언론·출판물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 창간호실


◆기획전시실

기획전시실에선 지금 증축개관 기념 특별전, '한의학 정립을 위한 위대한 여정 - 의서로 보는 조선시대 한의학'전이 열리고 있다. 조선시대 간행 의서를 통하여 한의학(韓醫學)의 정립과정을 이해하고자 기획됐다.


조선 전기 한의학의 특징은 고려 후기에 시작된 향약론(鄕藥論)을 계승, 심화해 향약의학을 정립시켰다는 데 있다. 그 결과 향약의학을 집대성한 <향약제생집성방>, <향약집성방>이 편찬된다. 조선 중기엔 중국의 새로운 의학설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며, 중국의 의서를 조선에서 다시 간행하게 된다. 이때 간행되는 의서는 <신응경>, <식물본초>, <세의득효방>, <중수정화경사증류비용본초> 등이 있다. 이처럼 지속적인 향약 연구로 쌓여진 본초학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 신의학설을 주체적으로 수용, 한의학의 이론적인 기반이 확대되며 자주적 의학의 완성을 이루는 시기를 맞는다. 그 완성은 1610년(광해군 2)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통해 이뤄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동의보감>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는 실학사상을 배경으로 그 내용을 간략화하고 자신의 경험을 더한 실용적 의서들이 편찬된다. <광제비급>, <제중신편>, <의감산정요결> 등의 의서가 여기에 속한다. 또 전염병·소아과·부인과·법의학 분야의 전문의서도 나온다. 19세기 서세동점의 격변기에서도 한의학을 계승하려는 노력은 계속됐으며 황도연, 이규준 등에 의해 새로운 의학설이 제시된다. 특히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이라는 독자적 의학설 성립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런 조선시대 한의학의 발달과정은 우리나라의 주체적 의학의 정립을 위한 노력의 과정이었다.

가천박물관은 지난 1995년 10월31일 이길여(가천대학교 총장) 가천문화재단 이사장이 설립했다. '박애, 봉사, 애국' 정신을 실천하고 가천대길병원을 아껴준 인천시민들의 사랑에 보답하자는 취지가 작용했다.

1000여점의 의생활사 자료, 1만1000여점의 의서를 포함한 고서와 고문서, 창간호 1만6000여점 등 4만5000여점의 유물과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14점이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되는 등 가천박물관은 한국 최대 의학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글·사진=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개관일 : 화~일요일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5시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추석연휴
■관람료 : 무료
■문의 : 032-833-4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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