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5-04 10:32
[태평로] 히틀러 이긴 도서관 對 코로나와 싸우는 도서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04/2020050400046.htm… [4]

65만 숨져도 매일 문 연 蘇도서관… 美는 '스쿨버스·마트 도서관'
유튜브·넷플릭스 시대일수록 디지털 광장·문화 거점 역할을


책등에 청구 기호가 적힌 두 권의 책이 책상에 오랫동안 놓여 있다. 하나는 신문사 근처 서울도서관에서 빌린 폴 크루그먼의 '경제학의 향연', 다른 하나는 집 가까운 이진아도서관에서 대출한 황정은 소설 '디디의 우산'. 빌린 지 석 달이 훌쩍 지났지만, 독촉하는 문자메시지가 없다. 아니, 한 달 전에 문자가 한 번 오기는 했다. 반납일이 내일모레로 다가왔다고. 그리고 두 시간 뒤 다시 문자가 왔다. "시스템 오류로 잘못 전송되었습니다."

6일부터 국립 도서관·박물관·미술관 등의 운영을 부분적으로 재개한다고 정부가 발표했다. 여기 포함되는 도서관은 세 곳. 국립인 중앙·어린이청소년·세종이다. 그나마 대출과 반납 서비스를 운영하는 곳은 세종시의 도서관뿐. 나머지 두 곳은 재개관하더라도 복사만 가능하다고 했다. 다른 지자체 산하 도서관은 아직 말이 없다. 산책 삼아 들러본 서울도서관 정문 앞 안내판은 마치 멈춰버린 시계 같다. '코로나19 관련 긴급 휴관합니다. 2월 25일부터 별도 안내 시까지'.

지갑 속에 네 장의 도서관 회원증이 들어 있지만 코로나 창궐 이후 별도의 안내를 받아본 국내 도서관은 없다. 유감이지만 흥미로운 안내는 태평양 너머에서 날아왔다. 10년 전 미국 연수 당시 살았던 콜로라도의 작은 도시 포트콜린스의 마을 도서관에서다. 코로나로 도서관 문을 닫은 건 미국도 마찬가지. 하지만 감염병의 시대에도 도서관 메일은 매주 날아왔다. 이번 제목은 이렇게 시작했다. '스쿨버스 도서관'. 휴교 때문에 운행을 쉬고 있는 학교 통학버스에 책을 싣고 지역 곳곳을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마트 도서관' 안내도 있었다. 이메일로 원하는 책을 미리 신청하면 동네 대형 마트에서 대출과 반납을 하겠다는 아이디어였다. 'New stay at home entertainment available'이라는 코너도 보였다. 의역하면 '집에서 즐기는 도서관'. 화상회의 앱 '줌'으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코로나 때문에 쉬고 있는 동네 헬스 트레이너가 각자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동영상으로 시범 보인다. 미스터리 10선, 로맨스 10선 등 전자책과 오디오책 안내와 대출은 기본이었다.

재난 상황에서 도서관의 역할을 강조할 때마다 인용되는 사례가 있다. 히틀러의 독일이 스탈린의 소련을 침공했을 때의 과학아카데미 도서관. 900일 동안 계속된 레닌그라드 봉쇄에서 독일은 식량과 연료를 차단했다. 영하 30도 강추위 속에 무려 65만명이 굶어죽고 얼어 죽고 총과 포탄에 맞아 숨졌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최대의 비극. 하지만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도서관은 멈추지 않았다. 직원 절반이 목숨을 잃으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문을 열었고, 심지어 군대와 병원을 위한 이동도서관까지 운영했다는 게 이 도서관의 자부다.

2차 대전 때 도서관과 2020년의 도서관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도서관의 역할도 달라졌고, 치명적 감염병으로 거리 두기가 필수인 상황에서 무조건 개관이 자랑일 수도 없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공공도서관은 단순히 책의 대출과 반납을 넘어, 그 지역의 문화 거점이자 마을 광장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노력 중인 몇몇 지자체 산하 작은 도서관의 분투를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뼘 더. 세계에서 가장 슬기롭게 코로나를 이겨내고 있는 우리 국민처럼, 우리의 공공 도서관들이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공동체의 문화 갈증도 함께 돌파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선일보.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2020.05.04